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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암살의 서태후

forever1 2020. 12. 2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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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암살의 서태후

 

사회학(社會學, sociology)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는 그의 저서 『사회 경제학적 조직이론』이라는 책에서 권력(權力, power)과 권위(權威, authority)에 관해서 설명했습니다.

권력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자신의 지위(地位, position) 또는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도록 강제 또는 지배하는 능력(ability to dominat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권위는 무엇일까요.

권위는 ‘개인의 영향력(影響力, leverage)에 의해 사람들을 기꺼이 여러분의 의지대로 행동(行動, action)하게 하는 기술(技術, technology),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정말 옳은 말입니다. 권력과 권위를 혼동하고 있는 우리의 위정자들을 막스 베버의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서태후(西太后), 그녀의 본명은 ‘엽혁나랍 난아, 葉赫那拉 蘭兒’입니다. 그녀는 1835에 태어나 1908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73년간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모든 권력을 다잡은 후, 어느 날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기차 여행을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는 기차가 생소해서 기차를 탈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명령했습니다.

“내가 타는 기차는 환관(宦官, eunuch)이 운전하도록 하라!” 정말 어이없는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남자를 그렇게도 밝히는 그녀가 환관 이외에는 남자들이 자기 곁에 근접을 못 하도록 했었습니다. 따라서 기차도 환관 이외의 남성이 운전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되었습니다.

기관차의 ‘기’ 자도 모르는 그녀가 명령했으니,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기관사(機關士, engine driver)와 화부를 환관으로 변장을 하여 기차를 운행했다고 합니다.

요즘 한창 우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신내림 직원’이라고 해야 하나요? 알아서 기는 충견(忠犬, faithful dog)들은 다른 모든 기차의 운행을 중단 시킨 것은 물론이고, 서태후가 타려고 한 기차는 궁전처럼 꾸몄습니다. 갑자기 대통령이 방문한다고 하니까, 4천200만 원이 든 14평 아파트 실내장식 비용(cost of interior)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전국에서 차출한 잘생긴 청년(Handsome young man)들과 섹스를 즐기며, 사치와 권력에 빠져 흡족해하는 동안 청조의 위기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 애로(Arrow)호 사건 등이 차례로 발생하여 각국의 식민지화 공세가 날로 심해졌습니다. 물론 청국 안에서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난폭한 권력의 폭정에 기죽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나타내지는 못했습니다.

목종의 뒤를 이은 덕종(德宗)도 그중 한 사람이었는데, 서태후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덕에 왕이 되었는데, 뭐라고?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덕종은 서태후 매제의 아들이었고, 그녀의 눈에 들어 즉위했지만, 나라가 돌아가는 것이 잘 못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 서태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권력을 빼앗았습니다.

그 후 덕종이 사랑했던 진비(珍妃)가 죽은 것도 그녀가 사주한 것으로 보인다고 사학자(史學者, historian)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악녀 서태후의 정치란 음모와 암살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정부라도 이런 구시대적인 정치 감각으로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외국의 식민지 공세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우선 청국 자체가 근대 국가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음에도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예산(豫算, budget)을 삭감하고, 자신의 별궁을 지은 것만 봐도 그녀는 자신의 권력 남용과 사치로 눈이 가려져 세상의 흐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때 만든 것이 그 유명한 북경의 이화원(頤和園, Summer Palace)입니다. 지금 일부 중국인 중에 이화원 덕분에 먹고 살고 있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화원을 만든 덕택에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으면, 청일 전쟁에 진 그것조차도 그녀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 군이 대승했사옵니다.”라고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녀가 두려웠으면 그랬을까요? 한 마디로 소통(疏通, communication)이 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통 부재의 결과가 이렇게 끔찍한 것이지요. 국민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프고 가려운 곳은 어딘지를 대화를 통해 알아내고 개선하고 방향과 비전(vision)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청국은 무너지게 된 것이지요.

청일 전쟁에서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점차 외국인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이를 이용하여 외국 세력을 제압하려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의화단의 본질도 이해 못 하고 개싸움 붙이듯 외국인에게 대항하게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청국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와 있었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청국의 멸망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붙이는 이름 선통제(宣統帝, 나중 만주국 황제(滿洲國 皇帝)가 발표된 다음 날 서태후는 73세의 파란만장한 일생(A turbulent life)을 끝냈습니다.

권력과 권위를 동일시한 그녀는 많은 중국인에게 고통을 주고 이 세상을 뜬 것이지요. 제발 우리의 위정자(爲政者, administrator)들도 권력과 권위를 동일시하지 말기를 빕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Utter power)을 휘두르지 마십시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권력은 유한하나, 사랑의 가치는 영원합니다.(Power is finite, but the value of love is eternal.)

 

단기(檀紀) 4,353년(CE, Common Era, 2,020년) 12월 27일

소백산 끝자락에서 김 병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