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님의 시방

로프

forever1 2018. 2. 8. 09:16



로프  /  김산

공중의 바람은 한시도 그대로 머무는 법이 없다
붙들린 기억 저편으로 얽매이고 달아났다 이내,
방치하고 짓무른 거리의 흙 알갱이들을 토해냈다
13년간 복직을 위해 뛰어다닌 관절염은
헛기침 소리에도 소울음을 게워냈고
욕설처럼 들이밀던 탄원서는 침묵의 목도장만
시뻘건 일수를 찍어댔다
끝까지 몰려본 사람은 안다
눈 덮인 산기슭에 놓인 덫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길로 쏜살같이 뚫고 나가는 산짐승은 안다
배낭에 생수 몇 통을 聖水처럼 짊어진 조성옥 씨는
지상 50미터 철강회사 굴뚝 위로 올라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징검돌처럼 한 생 한 생 밟을 때마다
죽지 위로 날개가 파닥거렸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금을 긋는 법이 없다
땅은 땅이면서 하늘은 하늘 그대로를 담고 있다
굴뚝의 몸뚱어리가 후끈 달궈진 쇠근육처럼
매일같이 조여왔다, 휘어졌다
장미보다 들국을 좋아하는 눈이 파란 아내, 코넬리아는
배낭에 울음을 담고 로프를 묶고 있다
대롱대롱 매달린 배낭이 출렁이며 경계를 넘을 때
그는 순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동여매고 산 한 올의 가닥은 무엇이었을까
백만 원 남짓의 서정적인 급료와
선술집에서나 통할 법한 철강 대기업의 명함 한 장
아니다 결코, 그건 아니다
웃자란 수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공중의 바람이
지난날, 그가 배포했던 굴뚝 아래 뒷굽들의
처우개선 유인물처럼 세상의 길가 구석구석까지
낮게 낮게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쌩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