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불신의 자식’, 도스토옙스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면서 언론인이었습니다. 그는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특히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20대 때 그의 소설 죄와 『벌(罪와 벌(罰)』을 사서 읽은 까마득하게 기억이 납니다.
4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1명의 영국 총리를 배출한, 런던 버크벡 칼리지(Birkbeck College)와 옥스퍼드 크리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라틴어와 철학, 역사를 전공했으며, 프랑스 영사 연구로 옥스퍼드 성 안토니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직을 역임했던 시어도어 젤딘(Theodore Zeldin)의 『The Hidden Pleasures of Life(삶의 숨겨진 즐거움)』, 『인생의 발견』으로 번역된 이 책의 362~363쪽에 수록된 「‘의심과 불신의 자식’, 도스토옙스키」라는 제목의 글이 너무나 흥미로워서 가지고 왔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스물여덟 살에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유독 강렬하게 매달렸다.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샘솟고”, “스스로 삶에 몰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삶은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것이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낸 4년은 그와 전혀 다른 사람들, 그가 지배계급의 일원이고 냉정하고 무뚝뚝하고 의뭉스럽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던 “거칠고 잔인하고 성마른” 죄수들과 어울릴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가 솔직히 털어놓은 것처럼 한순간도 혼자 있지 못하는 “끔찍한 고문”에 시달리며, “산 채로 매장되고 관 속에 갇힌” 느낌에 시달린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는 그 조수들 몇몇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던 “150명의 적들”에 둘러싸인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교육받은 엘리트가 무지렁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악한들 틈에서 인간을 알아보고 그들에게서 강인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알아보고 거친 땅속에서 금을 발견하는 기쁨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다. (……)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내 시간을 헛되이 버려지지 않았다. (……) 나는 아주 다양한 보통 사람들의 유형을 얻었다. (……) 책을 쓰고 또 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는 교육에 오염되지 않은 그들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도스토옙스키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하고 사회주의자이기도 하고 보수주의자이기도 하고 민족주의자이기도 하고 신앙과 불신을 모두 인정하는 정통파 기독교도이기도 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유럽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 사상이 병들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물질주의를 경멸했지만, 그의 삶은 돈의 지배를 받았다. 항상 돈이 모자랐다. 빚을 갚기 위해 맹렬히 글을 써내고 심지어 신문 연재 마감에 쫓기면서도 소설 두 편을 동시에 쓰기도 하고 그렇게 번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다. “돈이 없으면 어느 쪽으로든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는 모든 것의 비용을 계산했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범죄로 돈을 버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동시에 그는 돈에 대한 집착을 러시아의 관용과 형제애와 영성의 전통을 거역하는 세태라고 개탄했다.
그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전통적인 가족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족이 낳은 비극적 오해에 주목했다. 네 아버지가 “너를 잉태했고, 너는 그분의 혈육이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아버지가 나를 잉태했을 때 나를 사랑셨는가? 그분이 과연 나를 위해 나를 잉태했는가? 아버지는 나를 알지도 못했다. 어째서 아버지가 나를 잉태하고 평생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할까?” 도스토옙스키는 한 인물의 입을 빌려서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가족이 싫어도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라고 말한다.
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의심과 불신의 자식이다. 언제나 그랬고 관 뚜껑이 닫힐 날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무언가 믿고 싶은 절박한 갈망에 사로잡혔고, 갈망이 심할수록 그 믿음에 반박하는 주장도 강했다. ……>
도스토옙스키가 힘들게 번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다.라는 말이 얼른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정신병을 조금 앓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한 데서부터 그의 고뇌는 시작되었을 것이고 정신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 승리로 인하여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 존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직원 한 명으로부터 자신의 친구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처럼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이 샘솟고”, “스스로 삶에 몰두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삶은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라는 강한 삶에 대한 의지를 자살한 사람이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단기(檀紀) 4,356년(CE, Common Era 2,023년) 1월 29일
소백산 끝자락에서 作家(Author) 김 병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