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효종
1619~1659년 재위기간:1649년 5월~1659년 5월, 10년
인조 + 인렬왕후 한씨(5남)의 2남
소현세자 죽음과 봉림대군 세자 책봉
1637년 청은 병자호란을 종결짓고 돌아가면서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인조의 세 아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 중 셋째 아들 인평대군은 이듬해에 돌아왔으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뒤인 1645년에야 귀국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둘 다 청에 8년여 동안 함께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완전히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당시 청에 수입된 서양 문물을 대하면서 서양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익혀나간 데 반해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게 천주상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 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경험들은 반청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에서의 생활상은 역관이나 사은사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도 전해지게 되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가 서양 종교인 천주교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을 듣고 몹시 분개했다. 게다가 귀인 조씨와 김자점 등이 소현세자가 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다고 이간질을 시킴으로써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즈음 청나라는 명을 멸망시켰고, 세자 일행을 풀어주었다.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 두 아들을 데리고(큰아들 석철은 조선에 있었던 듯함) 1645년 2월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인조는 전혀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시 인조는 청으로부터 철저한 반청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반면에 소현세자는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은 조선과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인조와 상의하지 않고 심양의 조선관에서 소현세자와 상대하기를 원했다.
청의 이런 태도는 인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김자점, 귀인 조씨 등이 소현세자가 입국하면 왕위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인조의 경계심을 더욱 높여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도착하자 곧 인조를 찾아뵙고 청의 내부 사정과 서양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인조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고, 그가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인조는 심하게 분개하며 벼루를 들어 그의 얼굴에 내려치기까지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소현세자는 가슴 앓이를 하다가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병의 원인이 울화병인지 아니면 단순한 열병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당시 그를 진찰했던 어의는 학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때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그의 열을 내린다고 세 차례 침을 놓았는데, 그는 이 침을 맞더니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 놓고 진기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 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 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에 유배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 같은 일련의 행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반청 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 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 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에서 가지고 온 서양 문물을 찬양하며 조선이 변화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인조는 그런 세자가 청의 첩자 정도로 인식되었을 터이고 그것은 배반감으로 이어져 결국 아들을 독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제거되자 그때까지 심양에 남아 있던 봉림대군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그가 귀국한 것은 1645년 5월이었다. 인조는 한 달 뒤인 6월에 신하들에게 세자 책봉 의사를 밝혔으며, 9월에 봉림대군을 세자에 앉혔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외교를 주창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이 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북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효종의 북벌정책과 조선의 안정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청 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같은 북벌 계획은 끝내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성해져 사회 안저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효종은 1619년에 인렬왕후에게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정연이다. 1631년 12세에 장유의 딸 장씨와 혼인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과 함께 비빈, 종실 및 남녀 양반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어 형 소현세자 및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는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적극 보호하였으며,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하여 청의 요구를 막았다. 그 뒤 청이 서역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하여 그를 보필하기도 했다.
8년여의 볼모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고생을 겪으며 반청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 왕으로 등극했다.
효종은 청나라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 등지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고, 동쪽으로는 철령위, 개원위 등으로 끌려다니며 온갖 고초를 다 겪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대해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집권 초기부터 배청 분위기를 확산시키며 송시열의 북벌론에 근거하여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수립하기에 앞서 우선 친청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인 친청 세력은 김자점이었다.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이 탄핵을 받아 물러난 바 있으며, 이후 김류와 제휴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 관계를 보다 강화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혈 등 반청 인사들을 중용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조선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문서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난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외교 능력에 힘입어 이 사건은 무마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아들 이익으로 하여금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리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당했다.
김자점 역모사건으로 친정 세력을 모두 제거한 효종은 이완, 유혁연, 원두표 등의 무장을 중용하여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군비 확충 작업에 착수했다.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백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로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였고,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빈약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이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제도를 강화하고,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한양 외곽과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꾀했다. 효종은 이러한 군비 증강을 바탕으로 두 번에 걸쳐 나선(러시아) 정벌을 감행하기도 했다.
나선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불법적인 탈취 행위를 하였다. 그 때문에 주변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잦았으며, 나아가서는 청나라 군대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청은 누차에 걸쳐 나선인들의 국경 진입을 막았지만 그들은 점차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일삼았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를 보내어 영고탑에서 전추를 벌여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총포에 번번이 당하곤 하였다. 청은 별수 없이 조선 조총군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청은 조선 조총군사 1백 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영고탑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심의 끝에 조총군사 1백 명과 병력 5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이것이 1654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나선 정벌이다.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 따라 다시 조총부대 2백 명과 초관 및 여타 병력 60여 명을 파견해 제2차 나선 정벌에 나섰다. 나선 정벌에 나선 청군과 조선 조총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적을 만났다. 이때 나선군은 10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이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 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집념 어린 군비 확충 작업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혀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효종의 이런 국방 강화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효종은 국방 강화와 동시에 경제적인 안덩을 꾀하였다. 두 번에 거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저니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농가집서』등의 농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내훈』, 김정국이 쓴『경민편』등을 간행하였다.
효종은 평생을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으나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하여 때로는 군비보다도 현실적인 경제 재건을 주장하는 조신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인빈 이씨 등 4명의 부인에게서 1남 7녀를 얻었는데, 인선왕후 장씨 소생이 현종을 비롯한 여섯 공주이고, 안빈 이씨 소생이 숙녕옹주 1명이다. 능호는 영릉으로 처음에는 경기도 구리시의 건원릉 서쪽에 위치했다가, 후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옮겨졌다.
인선왕후 장씨(16181674)는 우의정 자유의 딸이며, 13세가 되던 1630년 한 살 어린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에 봉해졌다.
1637년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전하자 소현세자를 따라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가 8년여 동안 심양에서 생활하였다. 1654년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이 제때 되지 못해 사저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 뒤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어 2년 뒤에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1659년 효종이 죽은 후 1662년 효숙의 존호를 받아 대비로 있다가 1674년 질병을 얻어 죽었다. 그녀는 효종과 함께 영릉에 묻혀 있다.
효종실록은?
『효종실록』은 총 21권 2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649년 5월부터 1659년 5월까지 효종 재위 10년간의 역사적 사실들은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660년 5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2월에 완료되었다. 작업에 참여한 인원운 총재관 이경석을 비롯 도청당상 3명, 도청낭청 4명, 일방당상 5명, 일방낭청 7명 그리고 그 외 실무진 39명 등 총 59명이었다.
효종시대의 세계 약사
이 당시 유럽은 크롬웰이 집권하면서 영국의 힘이 강성해지고, 네덜란드에 의해 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추진된다. 또한 포루투칼은 네덜란드로부터 빼앗은 브라질을 점유하여 식민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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