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님의 시방

그만의 것

forever1 2006. 10. 25. 13:07






외딴 집에 홀로 사는
남자, 침묵은 그의 것
오후의 나른함과 권태는 그의
어깨 죽지에서 피어 오르고, 한두시간쯤
시간을 내어 그가 산책하는
길에는 잎사귀가 넓은
붉은 꽃들이 피어있다, 붉은 꽃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것
반항하지 않으며 그가 좋아하는
엉겅퀴 풀들, 엉켜 있는 뿌리들, 시간의
얼룩들 위를 지나









우리는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남자, 태양은 등 뒤에서 그의
뇌를 미지근하게 부풀린다 둥글고
딱딱한 것, 열에 들뜬 열매들
좁고 가파른 돌길을 걸어 내려와 우리가
한쪽으로 비켜섰을 때 우리 발 앞을
지나쳐간 남자, 그의 시간은
그만의 것, 그가 꿈꾸는 것과
위험한 생각들도
그만의 것









그가 비탈을 걸어 내려갈 때 그의 발이
굴러 떨어뜨리는 흙은 비탈에게 한 세계를 준다









그는 왜 모자를
썼을까, 왜 모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을까, 그는 살아가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 두렵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남자, 이따금
한번도 내려가보지 않은 강 아래쪽의 풍경과
한 낮의 수증기, 구름들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오후에 한두시간 쯤 시간을 내어 그는
어느 곳에 이른다 그의 삶은
그의 것, 그가 이르는 곳에는
그만이 서 있다, 꽃들의 그림자
그림자가 감추고 있는 그림자
산책하는 이들의 발길을 비웃는
비탈길에서 그는 미끄러진다, 미끄러져 내린다









우리가 놀고 있는 강 아래쪽으로 떠 내려온
남자, 죽음은 그의 것
햇빛을 피해 얼굴을 물 속에 처박고
뒤통수에 앉아 있는 검은 물 잠자리도
그의 것, 이미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고
알 수 없는 그만의 것에
이끌려 있다







그만의 것/류시화
사진/Karol Liver
The Conquest of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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