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의 양생법(養生法):포정해우(庖丁解牛) ★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일화를 통해 양생(養生)을 터득함
포정(庖丁)이 문혜군(文惠君:칭호로 보아 한 나라의 군주로 보이나 실존여부는
알 수 없음)을 위하여 소를 해체하였다.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으로 누르는 데 따라 (소의 가죽과 뼈가 서로 떨어져 나가면서) 획획하고
울렸으며, 칼을 휙휙 움직이면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상림(桑林:은나라 탕임금때 만들어진 춤곡)의 춤에 부합하고, 경수(經首:요임금
이 상제에게 제사 지내면서 연주하기 위해 만든 함지(咸池)의 한 악장)의 음절
에 들어맞았다. 문혜군이 말하였다.
"아아, 훌륭하도다! 기술(技)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포정이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그것은 기술(技)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중략…) 감각기관의 지각작용이 멈추고 신(神)이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입
니다. 소의 자연적 결(天理)을 따라 큰 틈새를 치고 큰 구멍에서 칼을 움직이
니, 소의 본래 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경락이 서로 이어진 곳, 뼈와 살과 힘줄
이 엉킨 곳에서도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거늘, 하물며 큰 뼈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중략…) 소의 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
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 사이로 집어넣으니, 널찍널찍하여 칼을 놀리는 데
반드시 여유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에 대해 터득하였노라!"
<장자(莊子), 제3 양생주편(養生主篇)> 中에서
리듬과 에너지의 조절로 하나가 되다
천한 백정이 소를 잡는 모습을 국가적인 행사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나 춤에 비유
하는 것은 장자 특유의 표현이다. 포정은 소를 잡음에 있어, 음악이나 춤처럼
리듬을 만들어 내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리듬은 이질적인 대상이
만나 공통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다루는 대상과 리듬을 잘 형성한다는
것은 기술이 뛰어나다는 말이기도 하다. 포정은 자기가 소 잡는 솜씨를 예술적
인 경지로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도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자의 생각에, 도는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道通爲一].
포정이 추구한 것도 작업을 통해 소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소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포정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흐르고 있는 에너지를, 소를 해체하기에 적합
한 상태로 만들고 힘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장자, 조화로운 삶의 철학자
우리는 대상이 내가 가진 목적을 충족시켜줄 때, 또 나에게 이득이 될 때 그
만남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대상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
을 좋은 만남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상대의 결을 무시하거나 대상을 내 목적에
맞게 폭력적으로 조작하거나 변형, 파괴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럴 경우, 장자는 칼날의 이가 나가버리듯이 결국 자기 자신이 지치고 소모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장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매 순간 내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
들, 대상들과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는 갈등과 반목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장자 철학이 의미 깊게 다가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자, 현세화의 타협을 거부한 자유분방한 철학자
고독한 은둔자나 비관적 방관자, 또는 상대주의자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 삶의 한 가운데서 그가 보여준 치밀하면서도 경쾌한 사유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자유분방한 철학자, 장자는 세상의 지배적인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는 방법을 추구했다. 청나라 왕이 보낸 두 대부가 낚시를 하고
있던 장자에게 와 정치하기를 청하자 그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구(神龜)가 있는데 죽은 지 3천년이나 되었다더군
요. 왕께선 그것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 위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지만,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이렇게 정치를 거부한 그였지만 장자는 세상을 관망하며 자연에 칩거한 은둔자
로 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방법,
세상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고민한 사람이었다.
장자가 자기변화를 강조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의 소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목적 때문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오해를 벗겨라! - 조화로운 삶의 정신
"조삼모사인 줄도 모르고…, 쯧쯧"
어리석은 사람은 조삼모사(朝三暮四)보다 조사모삼(朝四暮三)이 훨씬 이익이라
고 생각하며 기뻐한다. 실은 두 가지가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이렇듯 조삼모사는 어리석은 사람을 풍자할 때, 혹은 얕은 수로 남을 속이는
사람의 교활함을 풍자할 때 쓰이곤 한다. 하지만 장자의 조삼모사는 사뭇 다르
다. 아침 세 개, 저녁 네 개의 도토리에 만족을 못하던 원숭이들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에 만족한다면 이것은 '상황' 때문이다. 똑같은 양이지만,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는 나눠주는 방식만 바꿔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부를 수
있다. '명칭과 실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으면서' 원숭이와 저공(狙公)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 이것이 조화(調和)이다. 장자는 조화로운 삶
의 정신을 중시했던 사람이었다.
"정신을 수고롭게 해서 억지로 하나로 만들려고 하고 그 같아짐의 도를 제대로
모르는 것을 일러 '조삼(朝三)'이라고 한다. 조삼(朝三)이란 무엇인가?
저공(狙公)이 도토리를 원숭이에게 나눠주면서 말했다.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朝三而暮四).'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저공은 말했다.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朝四而暮三).'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 명칭과 실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기뻐하고 분노
하는 데 따라 작용을 일으켰으니, 역시 상황에 의거한 옳음(因是)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서 하늘의 녹로(天鈞)에서 쉰다.
이것을 일러 '양쪽을 모두 가는 것(兩行)' 이라고 한다."
우화(寓話)의 철학 - 아름다운 비유 속에 숨은 진실
장자는 문학적 몽상과 역사적 현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름다운
철학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장자의 소재는 신화적인 연관성이 풍부하다.
그러나 장자는 신화를 차용하긴 했지만 신화를 소개하거나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려 한다. 사상의 대부분은 우언
(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장자의 문장과 비유는 매우 아름다웠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는 화(化)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
이라고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껏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바다를
향해 옮겨간다. 남쪽 바다는 하늘의 연못(天池)이다."
"이상한 일을 다룬 『제해(齊諧)』라는 책에도 이 새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붕이 남쪽 깊은 바다로 갈 때, 파도가 일어 삼천리 밖까지 퍼진다. 회오리바람
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 여섯 달 동안 구만리장천을 날고 내려와 쉰다."
"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힘이 없다. 물 한 잔을 방바닥 우묵한 곳
에 부으면 그 위에 검불은 띄울 수 있지만, 잔을 얹으면 바닥에 닿아 버리고
만다. 물이 얕은데 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
를 띄울 힘이 없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간다."
글: 김경희(철학자)
【장자(莊子), 세상 속에서 세상 찾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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