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hip

롬멜의 리더십

forever1 2018. 2. 2. 10:16


에르빈 로멜 장군의 리더십.hwp



늘 최전선에서 조직을 이끈 에르빈 롬멜 "리더의 역할은 현장에서의 솔선수범이다"

입력 2018.02.01. 14:27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은 독일 나치의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치의 잔혹함, 편협성, 전쟁광적 용맹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예의와 배려심이 있는, 그래서 부하들이 진정 사랑한 장군이었다. 그의 리더십의 비밀은 단순하다. 그저 최전선에서 부하들과 같이 한 것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소통, 공감, 혁신 등의 다양한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

▶독일도, 연합국도 모두 존경한 품격

에르빈 롬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군의 영웅이었다. 비록 나치의 장군이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서 독일은 물론 당시 연합국의 정치가, 장군들도 인색하지 않다. 물론 이런 평가는 만약 롬멜이 여타의 나치 장군들과 같이 전쟁이 종료되고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면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영웅’답게 전쟁 종료 약 1년 전 자결했다. 죄목은 ‘히틀러 암살 음모 연루’였다. 히틀러와 나치는 롬멜의 공개적인 처형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신화로 만들어낸 전쟁 영웅이 히틀러와 나치에 반란을 꾀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히틀러는 롬멜에게 ‘가족의 안전 보장’, ‘전쟁 영웅으로서의 예우를 갖춘 장례’를 조건으로 청산가리를 마시라고 했고, 롬멜은 이를 받아들였다.

1944년 10월18일, 롬멜이 죽은 지 4일 후, 도나우강이 흐르는 독일 남부의 도시 울름에서 롬멜의 국장이 거행됐다. 공식 발표된 롬멜의 사인은 ‘전선에서 근무 중 입은 부상 악화에 따른 심장마비.’ 장례식장에는 많은 독일 국민이 참석해 전쟁 영웅의 최후를 애도했고 베토벤의 ‘영웅’이 연주되었다. 그의 묘는 뷔템베르크 주 헤를링엔에 만들어졌다.

롬멜은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독일인들이 그에게 보내는 애정과 존경은 차치하더라도 연합국의 지휘부 역시 롬멜의 존재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지휘한 영국 수상 처칠은 1942년 1월27일 의회 연설에서 롬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현재 키레나이카의 서부전선이 어떤 상황인지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대에게는 무척이나 용감하고, 유능한 장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참상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대담하고 솜씨 좋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전쟁의 재앙인 그는 그러나 장군으로서 더없이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영국군이 당한 참패 바로 옆에는 항시 이 걸출한 장군이 있었다’라고.”

롬멜에 대한 이 같은 평가는 군인으로서 롬멜이 거둔 위대한 승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의 부하들은 ‘우리의 대장이 롬멜이다’라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와 상대한 연합군조차 패배의 요인으로 ‘우리의 상대가 롬멜이다’라는 것을 당연한 듯 들 정도였다.

롬멜의 신화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었다. 1917년 10월, 롬멜은 산악부대 중대장이었다. 그는 약 150명의 병력으로 천혜의 요새인 알프스 마타주르산에서 이탈리아군 약 1만 명과 마주했다. 그는 속전속결 작전으로 9000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대승을 올렸다. 이 공으로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푸어르 메리테’ 최고 훈장을 받았다(이 훈장은 처음에는 다른 장교에게 주어졌다. 그 이유는 롬멜이 귀족 출신이 아닌 평민 출신 장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7기갑사단을 이끌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마지노 요새를 전격 작전으로 돌파해 프랑스 점령의 첫 단추를 열었다. 그가 지휘한 제7기갑사단은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기동작전으로 연합군을 무너뜨렸다. 이후 연합군은 제7기갑사단을 ‘도깨비 사단’, ‘유령 사단’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또 있다. 롬멜은 독일 아프리카군단 사령관으로 연합군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는 10만 명의 병력과 불과 약 150대의 전차를 갖고 20만 명의 병력과 1300대의 전차로 무장한 연합군을 상대로 예측을 뛰어넘는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연합군의 혼과 진을 빼놓았다. 연합군을 그를 ‘사막의 여우’라 불렀다.

만약 롬멜이 마치 ‘전쟁의 신’ 같은 전과의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면 그는 각국 사관학교의 교범에 오르내리는 ‘유능한 군인’ 수준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롬멜은 위대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리더였다. 그는 엘알라마인을 사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고민했다. 당시 롬멜 휘하의 수만 명의 병사들은 끊겨진 군수 지원에 싸울 무기도 없었고 전차는 불과 70대 뿐이었다. 그가 ‘평범한 군인’이었다면 롬멜은 사수를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롬멜은 수만 명의 병사, 즉 자신을 따르는 조직원을 살리고 조직을 살리기 위해 후퇴를 명령했다. ‘롬멜은 히틀러와 나치 추종자’라는 비판에 반론을 제기할 때 드는 첫 번째 예가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일로 롬멜은 히틀러에게 문책을 받았지만 그는 리더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히틀러에게 충성하는 군인’과 ‘조국을 위해 충성하는 군인’ 사이에서 조국을 선택했다. 또 있다. 그는 비록 적이지만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백기를 단 트럭에 식수를 가득 싣고 영국군에게 보냈다. 영국군은 그 답례로 와인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전투가 종료되면 독일군이든, 연합군이든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을 돌보았고 포로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 더욱 극악해지자 롬멜은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이며, 학살 행위는 크나큰 범죄 행위이다”라고 비난하며 히틀러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이처럼 롬멜은 탁월한 전략과 전술, 공격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용맹, 정치와 권력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군인이었다.

롬멜의 리더십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솔선수범, 현장 리더십이다. 롬멜은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최고 지휘관으로 후방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전쟁을 지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롬멜은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최전선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고 보병부대 출신답게 참호에서 뒹굴며 적과의 교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할 때는 지휘 전차를 타고 전차 부대를 이끌었다. 그리고 정찰기를 타고 적진을 살피거나 아군을 독려하기도 했다. 독일로 호출되어 대서양 방벽 작전을 지휘할 때는 지프를 타고 전선을 정찰하다가 연합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머리에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롬멜은 장군, 장교, 병사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탈리아 장군들이 전쟁을 하다가도 식사 때면 우아하게 하얀 천을 깔고 와인을 곁들어 음식을 먹을 때도 롬멜은 병사들과 똑같은 전투 식량을 먹고, 똑같은 모포를 덮고 야전에서 잠을 잤다. “롬멜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고 부하들은 느꼈고 이를 통해 롬멜은 무한한 신뢰를 부하들에게 얻을 수 있었다. 오직 명령으로만 움직이고, 생과 사의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다가오는 전쟁터에서 ‘신뢰’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무거운 요소인 것이다. 항상 병사들 곁에, 현장에 있는 롬멜을 보면서 부하들은 그와의 신뢰 형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롬멜은 전투에서 승리를 했고, 승리를 통해 부하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기록에는 롬멜의 공격적인 전술로 인해 많은 부하들이 희생당하고 고통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장군, 장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롬멜은 병사, 하사관, 초급장교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따뜻했다. 그들의 고충을 해결하려 노력했고 또한 부하들의 조언을 새겨들어 작전에 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롬멜은 고급 장교, 장군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다. 정찰을 하면서 전진을 주저하거나 후방에만 있는 지휘관에게 최전방에 나서라는 무전을 해 롬멜 휘하에 있던 하인리히 폰 프리트비츠 장군은 전투에 나섰다 전사하기도 했다.

롬멜은 군인, 전술가로서 큰 획을 그었지만 그에게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승리를 이끄는, 조직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조직원의 자발적 신뢰를 얻어내는 리더십인 것이다. 비록 나치의 장군이었지만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신발에 진흙이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리더의 품격’인 것이다.

▶전장에서 빛났던 전술과 통솔력

롬멜은 3남1녀 중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로 평범한 가정이었다. 롬멜의 유년 시절은 그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유독 하얀 피부라 별명이 백곰이었고 학교 성적은 하위권이었다고 한다. 다만 비행선에 관심이 많아 수학을 기본으로 한 항공역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롬멜은 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선 제작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장교가 되는 것을 원했다. 롬멜은 단치히 군사학교에 진학했다. 이 무렵 롬멜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롬멜은 당시 17세의 소녀 루시에 마리아 몰린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몇 개월 후 두 사람은 헤어지고 롬멜은 1912년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롬멜은 발부르가 슈테머와 사귀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는 못했다. 이때 슈테머는 임신 5개월이었다. 그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롬멜은 최전선으로 갔다. 롬멜은 슈테머를 사랑했지만 결국 첫사랑인 루시에 마리아 몰린과 1916년 결혼하고 아들 만프레트를 낳았다. 그러자 이에 충격을 받은 슈테머는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일설에는 자살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롬멜은 최일선 보병 장교로 그야말로 맹활약했다. 롬멜은 치열한 전투에서 허벅지 관통상을 입기도 했지만, 특히 임기웅변과 신속한 상황 대처 능력을 발휘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특히 마타주르산 전투는 거의 신화적인 전투로 독일군의 귀감이 되었다. 당시 마타주르산 카포레토는 중요한 요새.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이 요새를 점령하는 지휘관에는 군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약속할 정도였다. 롬멜은 불과 150명의 병력으로 약 1만 명의 이탈리아군을 상대해 이탈리아군을 괴멸 시켰다. 포로만 9000명을 생포할 정도의 대승을 거두어 군인으로서의 최고 명예훈장을 받았다. 당시 롬멜이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변화무쌍한 전투 상황을 냉정하고 직관적인 판단으로 전술을 운용한 신속한 대처 능력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핵심 무기는 기관총과 전차였다. 이를 간파한 롬멜은 기관총을 보병 부대에 배치해 화력을 집중하는 효과로 수적으로 우세인 이탈리아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가 가장 신봉하고 즐겨 쓰는 전술은 기동력과 속도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공격과 후퇴였다. 이는 적에게는 준비 부족을, 아군에게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롬멜은 공격적인 전술을 운용했다. 롬멜은 평소 “승리는 먼저 공격하는 자의 것이다. 늦게 움직이는 자는 2등이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상황과 시대의 변화에 가장 빠르게 대응하고 혁신하는 리더의 역할을 보여준 셈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다. 당시 롬멜은 28세, 계급은 대위였다.

▶히틀러의 신임으로 고속 승진하다

전후 독일은 혼란기였다. 혼란기에는 필연적으로 ‘영웅’이 탄생한다. 그 시기, 독일에 등장한 새로운 권력, 새로운 대안은 히틀러와 나치였다. 군인으로서 롬멜은 나치 정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치는 위대한 독일의 재건, 군대의 정비와 확장을 주장했다. 당시 롬멜을 비롯한 독일군의 정서는 당연히 히틀러와 나치에 호의적이었다. 1933년 소령이 된 롬멜은 의장대를 지휘하면서 히틀러와 처음 대면한다. 그리고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히틀러에 대한 호의와 충성심 가득한 연설을 하게 된다. 1935년 롬멜은 히틀러의 본부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 히틀러와 나치는 군대를 가장 중요한 충성스런 집단으로 여기고 있었고 군대식 행진, 열병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이 행사를 통해 롬멜은 히틀러와 매우 가까워진다. 그리고 1939년 롬멜은 파격적으로 승진한다. 소장이 된 롬멜은 총통부에서 히틀러를 경호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히틀러가 자신의 신변 경호부대 지휘관으로 롬멜을 임명할 정도로 그는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히틀러 옆에는 항상 롬멜이 있었고, 그는 16명의 장교, 274명의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총통 경호부대를 지휘하며 나치 독일군의 핵심 엘리트가 된 것이다.

평민, 사병 출신의 히틀러는 평소 귀족 출신의 독일군 장군들을 탐탐치 않게 여겼다. 대신 히틀러는 평민이면서 이론을 갖추고 직관적인 전술을 펴는 롬멜같은 장교와 자신의 친위부대인 SS부대만을 신임했다. 즉 롬멜은 히틀러가 동지적 유대 관계를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롬멜을 좋아했다.

독일은 전격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폴란드 국경을 넘은 지 불과 20일 만에 독일은 폴란드를 병합했다. 롬멜은 제7기갑사단장이 되었다. 보병부대 출신에게 기갑부대는 생소했지만 롬멜은 개의치 않았다. 롬멜은 바로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다. 롬멜은 “기다리라”는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기습적으로 마지노선을 돌파했고 이내 프랑스군을 임계선과 후방 부대로 갈라놓았다. 이른바 롬멜이 즐겨 쓰는 ‘양단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전선의 프랑스군은 고립되었고 이내 프랑스 전선은 붕괴되었다. 그는 “적이 할 수 있는 작전을 펴는 지휘관은 무능한 것이다. 승리는 적에게 예측할 수 있는 시간과 계획을 주지 않을 때 얻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롬멜의 속도전은 프랑스 군대에게 공포의 존재였다. 롬멜은 독일군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전차 전문가가 되었다. 이때가 1940년으로 롬멜의 나이 48세이다. 롬멜은 중장으로 승진했다.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 신화를 만들다

독일, 이탈리아 추축국과 연합국의 전선은 확대되었다. 그 한 축이 바로 북아프리카였다. 이탈리아군 사령관 그라치아니는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공격한다. 그러나 리처드 오코너가 지휘하는 영국군은 대반격을 시도해 이탈리아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이탈리아 식민지 리비아를 거의 점령해버렸다. 이에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리비아를 잃은 이탈리아가 동맹의 대열에서 이탈할 것으로 염려해 아프리카 군단을 창설하고 그 지휘관으로 롬멜을 임명한다. 당시 롬멜은 독일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괴벨스의 독일 선전성은 프랑스 작전에서의 독일군의 승전을 담은 영화 <서부의 승리>를 만들어 독일 국민과 군인들에게 애국심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롬멜이었다.

1941년 2월12일, 롬멜과 아프리카군단은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했다. 바로 ‘사막의 여우’로 불리게 된 롬멜 신화의 시작이다. 롬멜은 정찰기에 몸을 실었다. 전선을 파악한 롬멜은 바로 움직였다. 롬멜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일종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맞서는 영국군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 때문이었다. 그는 영국군의 영웅이며 수많은 전투 교본을 쓴 장군으로 롬멜은 그가 쓴 책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롬멜은 키라나이카로 진격을 명령했다. 아군과 적군 모두 예상을 뒤엎는 작전이었다. 당시 영국군은 수비에만 치중했다. 또한 그들은 롬멜이 사막 전투에 경험이 없어 몇 달 정도의 적응기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를 롬멜이 역이용한 것이다. 롬멜의 기습전 앞에 영국군은 무너졌고 롬멜은 2개 기갑사단만으로 영국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사막전 전문가인 영국군 리처드 오코너 소장이 롬멜에게 포로로 잡힐 정도로 독일군의 대승리였다.

이후 롬멜은 토브록 전투 등 몇 번의 승리를 더 얻어 원수로 승진했다. 하지만 전세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영국과 미국은 아프리카 전선의 중요성을 깨닫고 막대한 물량과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롬멜이 지휘하는 2개 기갑사단의 전차는 불과 150여 대인데 비해 연합군은 전차 1300여 대, 병력만 20만 명이 집결해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물량에서 롬멜은 연합군에게 지고 있었다. 롬멜은 이집트 국경을 넘어 엘아라마인에 도착한다. 하지만 철벽방어진을 치고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은 롬멜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연합군 사령관 몽고메리는 반격을 시도했다. 1942년 10월 전투에서 롬멜은 몽고메리의 연합군에 대패했고, 아프리카 전선의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롬멜은 베를린에 계속 병력과 전차, 군수품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오는 답신은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무조건 결사항전하라”였다. 당시 히틀러는 소련 전선에서 늪에 빠졌다. 엄청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해 소련을 침공했지만 소련의 동토 작전에 걸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히틀러로서는 롬멜을 지원하고 싶어도 지원해줄 병력과 전차가 없었다. 오히려 히틀러는 카이로와 스웨즈 운하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롬멜은 고민에 빠졌다. 히틀러의 명령대로 전투를 시작하면 병사들이 희생당할 것이고,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면 항명죄가 되는 것이다. 롬멜은 퇴각 결정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군인으로서의 야망을 병사들의 생명과 바꾼 것이다. 롬멜은 그 어떤 지휘관보다 병사들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휘관이었다. 알라메인을 앞에 두고 독일군은 후퇴했다. 1942년 11월, 이때부터 롬멜은 전쟁, 히틀러, 나치에 대한 깊은 고민과 갈등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 히틀러의 정책에 무조건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1943년 3월9일, 롬멜은 독일로 소환되었다.

▶히틀러 대신 조국을 선택하다

독일로 돌아온 롬멜은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아프리카군단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히틀러는 롬멜을 아프리카에 보내지도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의 영웅 롬멜이 자칫 연합군의 포로로 잡히는 것을 염려했다. 그들은 이미 아프리카를 포기한 것이다.

롬멜은 히틀러에게 품었던 일종의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해 롬멜은 “국가의 정의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며 히틀러의 학살 명령을 거부했다. 전선은 더욱 히틀러에게 불리해졌다. 연합군은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롬멜을 프랑스 해안 방위책임자로 임명했다. 롬멜은 연합군의 상륙 가능지역을 덩케르크에서 디에프에라고 예상하고 강력한 방어선 구축을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히틀러가 롬멜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1944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상륙 당일 베를린에 있던 롬멜은 전선으로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독일군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 해 7월17일 롬멜은 차를 타고 전방을 가던 중 영국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머리에 중상을 입는다. 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롬멜은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첫째는 ‘이미 이 전쟁은 독일이 패배했다’, ‘독일은 연합군과 협상을 벌여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였다. 더 이상 독일군과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고 또한 독일이 폐허가 되는 것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즉 ‘히틀러에 대한 군인으로서의 충성’과 ‘조국과 국민에 대한 충성’ 중에서 롬멜은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독일군 일부 수뇌부가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다. 그들은 롬멜에게 “히틀러를 암살하고 롬멜이 독일의 국가 원수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롬멜은 히틀러에게 “이미 전쟁은 독일이 패배했다. 연합국과 휴전을 전제로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히틀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히틀러와 강경파들은 롬멜을 차츰 배신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1944년 7월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히틀러는 광기에 사로잡혀 모두를 숙청했다. 그 과정에서 롬멜의 연루가 드러났다. 1944년 10월14일, 게슈타포 요원들이 울름에 있는 롬멜의 집을 급습한다. 그리고 롬멜에게 “조용히 자살하면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원수로서 국장을 치루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히틀러는 ‘국민의 영웅’이 된 롬멜이 암살 쿠데타에 연루되어 처형되는 것이 여론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롬멜은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들을 따라 집에서 약 500m 떨어진 길가에 주차된 벤츠 안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했다. 이 부분에서 다른 이야기, 즉 롬멜이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슈파이델 장군이 히틀러 암살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롬멜은 히틀러에게 그를 변호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가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렸다. 또한 “총통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주변에 말했는데 그 말을 롬멜에게 평소 원한이 품고 있던 마르틴 보어만이 히틀러에게 전달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롬멜을 총통부로 불렀다. 그에게 마지막 ‘변명’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롬멜은 히틀러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게슈타포가 롬멜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리더십 | 탁상공론은 버려라, 대신 혁신하고 변화하라

롬멜은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에 임한 적이 거의 없다. 항상 부족하고 최악의 여건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거둔 이탈리아군과의 전투 역시 병력 수에서 1/17의 약세를 딛고 승리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기갑전을 이끌 때는 물량보다는 예측할 수 없는 기습전으로 승리했다.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 때는 롬멜의 전차 수는 연합군의 약 1/20에 불과했다. 그러나 롬멜은 승리했다. 그 비결은 바로 관행, 습관, 틀, 고정관념에서 벗어 났기 때문이다.

롬멜은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전술을 펼쳤다. 빠르고 많은 적 앞에서는 천천히 그리고 전력을 한 곳으로 집중해 대항했다. 거대한 적은 분산 시켰고, 추격할 때는 후퇴하는 적보다 더 빠르게 기동전을 펼쳤다. 그리고 위장과 기만 전술도 빼놓지 않았다.

롬멜은 영국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열세인 전차 수를 ‘위장 전차’를 만들어 극복했다. 폭스바겐 승용차에 널빤지를 붙여서 전차처럼 위장하고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전진한 것이다. 영국군은 깜짝 놀랐다.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롬멜의 전차부대가 무려 수백 대나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보고 영국군은 혼비백산해 후퇴를 한 것이다. 또 있다. 롬멜은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대공포를 경전차에 고정시키는 기발한 발상을 했다. 영국군 전차는 롬멜의 부대를 뒤쫓다가 매복해 있던 대공포를 직격으로 맞아 패배하고 말았다. 이처럼 롬멜은 교과서를 신봉하지 않았다.

롬멜은 승리하기 위해 조직에 속도를 부여하고 혁신했다.

롬멜이 제7기갑사단을 이끌 때였다. 당시 전차들은 전진하다가 멈추어서 포격을 했다. 그래야 명중률이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멈춰서는 순간 적에게 노출되는 단점이 있었다. 롬멜은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전차 전투 시 모든 전차는 달리면서 포를 쏘라.” 참모들은 깜짝 놀랐다. 움직이면서 포를 쏘는 것은 전함이 해전에서 쓰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탄환을 낭비하는 꼴입니다.” 참모들의 질문에 롬멜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투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이기는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현대 전차전은 롬멜의 이 방식이 교범이 되었다.

또 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은 후퇴하는 영국군을 추격했다. 물론 후퇴하는 영국군의 전력은 롬멜군보다 우세했다. 추격전을 펼칠 수 있는 길은 세 곳이었다. 롬멜의 참모들과 후퇴하는 영국군은 같은 생각을 했다. ‘전력을 집중해 한 곳으로 추격한다’고. 롬멜을 이를 뒤집었다. 그는 부대를 삼분해 빠른 기동력으로 영국군을 추격했다. 영국군은 기겁을 했다. 당연히 한 곳으로, 한참 후에나 나타날 롬멜이 몸을 드러내자 또 후퇴하고 말았다. 이처럼 롬멜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시도한, 현대적 의미에서 ‘혁신의 리더’라 할 수 있다.

물론 롬멜의 빛나는 전공의 밑받침은 롬멜부터 맨 아래 전투 사병까지 서로를 신뢰하는 일체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직원의 능력과 고충을 알지도 못하면서 명령만 내리는 리더, 리더의 말이 그저 책상에서 만들어낸 공허함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조직원, 이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 조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롬멜은 행동하는 리더십, 솔선수범의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그에 대한 부하들의 존경은 전투에서 승리로 나타났고 심지어 점령지 주민들도 롬멜을 존경했다고 한다.

롬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엄연히 존재한다. 특히 히틀러와의 관계이다. 롬멜이 히틀러의 경호대장을 지내면서 히틀러의 총애자 명단에 든 것이고 이는 나치당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롬멜이 히틀러에 대해서만큼은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정은 어렵다. 하지만 그가 아프리카 전선에서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한 점, 유대인에 대한 학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점, 히틀러 암살 음모를 알면서도 게슈타포에 알리지 않은 점, 히틀러의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스스로 뿌리친 점으로 보아 롬멜이 갖고 있던 히틀러에 대한 환상은 이미 오래 전에 깨진 것으로 보인다. 롬멜은 히틀러 대신 조국을 선택했고, 영광스런 승리를 위한 부하들의 희생 대신 명령불복종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롬멜의 리더십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리더십의 주인공들과 비교해 특별하지 않다. 그의 승리는 매우 영웅적이고, 신화적이지만 그의 리더십은 ‘부하들과 함께’라는 것이다. 전쟁터는 항상 어려움과 고통, 배고픔과 추위, 삶과 죽음이 옆에 있다. 그 순간 고개를 드니 우리의 리더가, 대장이 내 옆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조직은 위대해질 수 있으며, 리더는 부하들의 충성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인용 및 참조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크리스터 요르젠센 지음 / 오태경 옮김 / 플래닛미디어 펴냄), <신화로 남은 영웅 롬멜> (찰스 메신저 저 / 한상석 옮김 / 플래닛미디어 펴냄)]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15호 (18.02.0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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