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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장소·시간 다르지만.. 내 두딸은 쌍둥이랍니다"

forever1 2018. 2. 12. 08:52



"태어난 장소·시간 다르지만.. 내 두딸은 쌍둥이랍니다"

강릉/임경업 기자 입력 2018.02.12. 03:04

[첫째딸은 남북단일팀 둘째는 미국팀.. 강릉서 만난 브란트 부부]
- 피가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
입양 결정한 뒤 임신 사실 알게돼.. 결혼 12년만에 두 딸 동시에 얻어
- 두 딸 중 어느 팀을 응원할까
아빠 "미국보다 약한 단일팀 응원"
엄마 "난 중립.. 안 다치기만 바라"

"오늘 밤은 제 인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서로 다른 나라를 대표하지만, 두 딸 모두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으니까요."

10일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의 평창올림픽 첫 경기 스위스전이 열린 강릉시 관동하키센터. 단일팀 박윤정(25·미국 이름 마리사 브란트)과 미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한나 브란트(25)의 아버지인 그레고리 브란트(63)씨는 가슴에 'KOREA', 등에는 '박윤정'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어머니 로빈 브란트(61)씨도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

금발의 백인인 부부는 박윤정을 딸이라 불렀다. 단일팀이 득점 찬스를 놓치면 발을 동동 구르며 응원했다. 로빈씨는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마리사의 엄마입니다. 우리는 가족이에요"라고 했다.

가운데 사진은 자매로 자란 박윤정(왼쪽)과 한나 브란트가 어린 시절 각각 태극기와 성조기를 그려 머리에 두르고 태극기 부채를 함께 들고 웃는 모습. 둘은 아이스하키 선수로 성장해 박윤정(왼쪽 사진)은 남북 단일팀, 한나(오른쪽 사진)는 미국팀 대표로 평창에 출전했다. 아래 작은 사진은 로빈(왼쪽)·그레고리 브란트씨 부부가 10일 강릉 경기장에서 'KOREA'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모습. 부부는 두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본지에 전해왔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유튜브 캡처·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 미네소타에서 작은 청소업체를 운영하던 브란트씨 부부는 결혼 후 12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1993년 5월, 부부는 한국에서 태어난 생후 4개월 여자아이를 입양했다. 박윤정이란 이름으로 출생신고 된 아이에게 부부는 '마리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로빈씨는 박윤정의 동생 한나를 낳았다.

로빈씨는 "입양을 결정하고 2주 뒤에 임신 3개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우리 부부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마리사가 미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날마다 아이 사진을 보면서 기다렸다"고 했다. 그레고리씨는 "쌍둥이 자녀를 키운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에요. 마리사를 공항에서 처음 품에 안았을 때 어찌나 작고 따뜻하던지. 그 순간을 영상으로 찍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얌전하던 박윤정은 동생 한나가 아이스하키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는 2년 뒤 스틱을 잡아 함께 선수 생활을 해왔다. 박윤정은 2015년 한국 대표팀 제의를 받고 작년 6월 국적을 회복해 평창올림픽에 나섰다. 한나는 미국 대표팀의 세계선수권 우승(2015·2017년)을 이끌고 평창에 왔다.

로빈씨는 "마리사는 한국을 무서워했고 한국 대표팀 제의를 받았을 때도 겁을 잔뜩 먹었다"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어려웠던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어린 시절 박윤정과 한나를 함께 한국 문화 캠프에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한나는 매운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고 태권도에도 흥미를 느꼈지만, 오히려 박윤정은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이 불편하다. 엄마, 아빠, 한나와 똑같아 보이고 싶다"며 투덜댔다고 했다.

이제 박윤정은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올림픽을 통해 친엄마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브란트씨 부부도 "딸이 스스로를 위해 친부모를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로빈씨는 올림픽 개막 직전 박윤정이 출연한 광고 영상을 보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영상에서 박윤정은 로빈씨를 향해 말한다. "태어난 나라를 대표하는 꿈을 이뤘고, 낳아준 엄마도 특별하지만…꼭 알아줬으면 해요. 당신은 내 엄마이고 누구도 내게 당신만큼 큰 사랑을 주진 못했을 거예요."

한나가 출전한 미국팀도 11일 핀란드와 첫 경기에서 3대1 승리를 거뒀다. 두 딸이 서로 다른 나라를 대표해 경기에 나설 때 부모는 누구를 응원할까. 그레고리씨는 "상대적으로 약팀인 남북 단일팀을 응원한다"고 했고 로빈씨는 "중립"이라며 웃었다. "두 딸이 다치지 않고 마음껏 즐겼으면 해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 정말 자랑스러워요."

두 딸에게 보내는 엄마·아빠의 편지

너희 둘을 보고 있으면 엄마 아빠는 마음이 흐뭇해. 사람을 존중하고 늘 친절하게 대하는 멋진 여성들로 자라줬으니. 너희 둘을 '우리 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축복이란다.

마리사야, 네가 처음 우리 삶에 들어왔을 때 너는 참으로 귀한 선물 같았어. 오랫동안 기다려온 엄마 아빠에게 너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었지. 네가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한나라는 또 다른 선물이 도착했어. 태어난 나라는 달랐어도, 두 꼬마는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가 됐지.

마리사야, 너는 어려서부터 춤과 체조, 피겨스케이팅을 좋아하던 얌전한 소녀였어. 반면에 한나는 동네 남자애들과 어울려 야구, 축구 하면서 씩씩하게 뛰놀았지. 하키에 열정을 쏟아붓는 한나를 보고 마리사도 따라서 하키를 배우기 시작했어. 그 뒤로 늘 함께할 수 있었던 거야. 삶이 주는 환희와 좌절을 함께 겪어내는 너희 둘을 바라볼 때, 부모로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우리 딸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평창올림픽에 나란히 참가하게 됐으니 마리사와 한나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구나. 우리 가족 다 같이 올림픽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야. 너희 둘이 한국팀과 미국팀이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과정을 밟아 마침내 이 순간에 함께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엄마 아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꿈을 이룬 마리사와 한나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빈다. 너희 둘은 행운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니까. 우리 딸들이 정말로 자랑스럽다.

엄마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