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으므로 내려왔으나 올라가지 못해 재가 됐다
입력 2018.04.14. 05:06
고스트 스토리 ④ 주민번호 111111-1111111의 운명
[한겨레]
▶2001~2017년 인천광역시의료원을 거쳐간 무연고 사망자 195명 중 41명이 변사했다. 그들의 절반인 21명은 북한인들이었다.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주검이 되어 남쪽 바다로 떠내려 왔다.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통일부로부터 제출받은 ‘1999년~2018년 2월 북한 주민 사체 처리 현황’을 토대로 바다-죽음-분단-정치의 관계를 추적했다. 의원실이 별도 확보한 개별 사체 ‘처리’ 기록들이 ‘쪼개진 땅이 몰랐던 죽음들’에 이야기를 보탰다. 죽었으므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 수 있었던 사람들의 20년치 통계와 추이가 처음 공개된다.
그는 바다에서 죽어 이 도시로 왔다.
발견 2015년 7월3일 낮 12시50분. 해병대 초병이 인천시 강화군 교동대교 해상에서 표류중인 변사체를 확인·보고했다.
교동도(강화군 교동면)는 강화도에서 북서쪽으로 1.5㎞ 떨어진 섬(면적 47.14㎢)이다. 북쪽 바다 2.5㎞ 너머엔 북한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연백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섬에 올라 ‘곧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70년을 기다려도 돌아가지 못한 땅이 눈으로 훤히 보였다.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에 다리(7월1일·길이 2.11㎞ 교동대교)가 놓였다. 고향이 그립고 실향이 슬플 때마다 다리를 건넌 사람들이 화개산에 올라 망향(望鄕)했다. 섬과 섬 사이를 통과하며 바닷물은 굵어지고 질겨졌다. 다리 개통 1년 이틀 뒤 그 바닷물에 쓸려온 남자가 다리 13번 교각 하단에 걸렸다.
바다만 아는 죽음
인양 2015년 7월3일 오후 1시32분. 해병 기동대원들이 보트를 타고 변사체를 건져 올렸다.
교동도는 섬 전체가 민간인 통제 구역이었다. 검문을 거쳐 출입증을 받아야 교동대교에 진입할 수 있었다. 철책이 모든 해안선을 둘러쌌고 초소와 감시카메라가 사방을 경계했다. 남북 사이엔 철책 바깥으로 바닷길만 뚫려 있었다. 철책 밖에서 움직이는 물체 전부가 감시·제재 대상이었다. “누군가 갯벌에만 내려서도 병사들이 출동”(부대 관계자)했다. 바다와 갯벌 쪽으로 민간인이 접근하려면 교동대교 위를 자동차를 타고 지나는 방법(바람이 거세 보행 통행도 안전상 금지)뿐이었다. 다리 아래에서 사람이 포착됐다면 그는 군인이거나, 군사분계선을 넘는 자거나, 죽은 자였다. 변사체를 실은 보트가 오후 1시50분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조사 2015년 7월3일 오후 2~7시. 강화 지역 정부합동조사팀(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 등 군사·정보 기관들로 구성)이 모여 남자의 신분과 ‘대공 용의점’을 확인했다.
남자의 썩은 몸은 러닝셔츠와 국방색 얼룩무늬 군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북한 화폐 7장(1만3500원)과 북한제 담배(꿀벌), 중국제 소형라디오가 유류품으로 나왔다. 근육 상태가 평범하고 정권 단련 흔적(군사훈련 가능성)이 없으며 휴대한 물건들도 대남 침투와는 무관하다고 조사팀은 판단했다. 사체가 발견된 인근 해상에서 북한과의 최단 거리는 9588m였다. 조사팀은 남자를 북한에서 떠내려온 민간인 사망자로 결론지었다.
93구 교동도는 북한인 사체가 자주 발견되는 섬이었다.
2011년 8월3일에도 한 남자의 변사체가 해병대 초소 근처에서 떠올랐다. 경찰이 파악해 파출소에 신고·접수했다. 합동조사팀은 북한인 주검이라고 봤다. 시신으로 갯벌에 상륙(1996년)하거나 탈북해 해안으로 헤엄쳐 오는 사람들(2014년·2017년)도 있었다.
1999년 4월 정부는 ‘북한주민사체처리지침’을 국무총리 훈령으로 제정(이전까지는 지침 없이 대한적십자사와 유엔사가 각각 민간인과 군인을 북으로 인도)했다. 제정 뒤 20년(1999년~2018년 2월) 동안 통일부로 보고된 북한 민간인 추정 사체는 93구였다. 임진강, 한탄강, 북한강, 서해(옹진군 연평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덕적도 해상), 동해, 여수남방 공해(2014년 4월 그랜드포춘1호 침몰) 등에서 건져 올린 시신들이었다. 어민들이 조업 중 발견해 신고하기도 했다.
미상 육지가 두 덩어리로 쪼개진 뒤부터 철책에 가로막히지 않고 남쪽에 닿을 수 있는 길은 물길뿐이었다.
북한 개성시 장풍군·판문군·개풍군과 남한의 철원·연천·파주 사이로 빠져나온 임진강물은 교동도를 돌아 서해로 합류했다. 홍수가 나면 임진강은 자주 범람했다. ‘고난의 행군’(1990년대 중반) 때 돌을 쌓고 흙을 이겨 지은 허술한 집들이 물이 넘칠 때마다 물줄기에 밀려 떠내려갔다. 물이 불어난 강에서 물고기를 잡다 목선이 전복되거나 물가에서 쓸려 내린 사람들도 강물에 휩싸였다. 물에 실려 오는 가축이나 물건을 건지려다 물에 붙잡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에 의지해 북을 벗어나려다 물에 잠겨버렸을 가능성(이상 주승현 전주기전대 교수의 목격과 분석. 임진강 유역 부대에서 근무하다 2002년 비무장지대를 넘어 귀순)도 없지 않았다. 그들의 주검이 임진강(2004~2015년 19구)을 따라 내려오다 북한강(2구) 쪽으로 꺾거나, 교동도에 닿거나, 서해(30구)까지 흘러갔을 것이었다.
검안 2015년 7월3일 저녁 7시30분. 교동대교 교각에서 인양된 남자가 인천광역시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의사가 주검을 살폈다. 합동조사팀의 ‘북한인 변사체’ 결론을 고려해 부검은 하지 않았다. 사체의 백골화와 부패가 심해 지문 채취가 불가능했다. 죽음의 원인도 확인할 수 없었다. 사망한 지 최소 한 달은 지난 것으로 판단했다.
1999년 북한사체처리지침 제정 뒤
지난 20년간 통계 처음 집계·공개
북한인으로 통일부 보고된 93구 중
통일부가 북으로 송환한 주검 84구
북한이 인수하지 않은 시신은 4구
조사팀이 민간인으로 보고한 주검은 경찰이나 해경(군인일 경우 국방부)이 인계받아 국공립병원에 안치했다. 2001~2017년 인천의료원을 거쳐간 무연고 사망자 195명 중 변사자는 41명(전체의 21%)이었다. 그들의 절반인 21명이 북한인(10.7%)으로 추정되거나 확인됐다. 2017년 8월 옹진군 연평도 동북방 해안에서 발견된 사체(여)가 병원에 도착했다. 시취가 안치실을 뚫고 나왔다. 20일여 뒤 추가 시신이 인양됐다는 연락이 왔다. 두 구의 냄새를 동시에 감당하기 어렵다는 의료원의 호소로 다른 장례식장으로 보내졌다.
정치에 따라 출렁
검시 2015년 7월6일 오전 11시. 검찰이 ‘교동대교 남자’의 죽음과 범죄 연관성을 조사했다.
165㎝의 키에 주목할 만한 외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바다를 타고 분단을 넘은 자들의 죽음은 모호했다. 물에 불어 상한 주검들만큼 죽음의 이유도 퉁퉁 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남하의 과정도 확인되지 않았다. 죽었다는 사실만 분명했다. 검찰은 사인과 사망 시기를 특정하지 못했다. 합동조사 결과대로 북한 사체로 ‘처리’하도록 지휘했다. 북한 민간인 시신은 북으로 올려 보내야(국무총리 훈령) 했다.
88구 교동도에서 4년 간격으로 건져진 두 남자의 운명이 엇갈렸다.
2011년 8월 인양된 남자는 일주일 만에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시신의 대북 송환은 통일부가 주관했다. 북한에 사실을 통지한 뒤 인수 의사를 전해오면 북으로 인도했다. 사체가 군인이면 국방부 장관이 유엔사를 통해 송환(2004~2015년, 14구)했다. 정전협정 위반인 사체와 공작원으로 판명된 주검은 국방부 장관과 국정원장이 처리했다.
남자를 실은 장의차량이 판문점(사체 처리 원칙)으로 향했다. 한국적십자사 회원들(2007년 통일부-적십자사 북한 민간인 운구 업무협약)이 판문점에서 그를 맞았다. 6명이 양쪽에서 관을 들고 군사분계선 쪽으로 걸었다. 국내 무연고자(화장관)와 달리 북한인 시신엔 매장관을 썼다. 수의와 장례용품도 좀더 나은 가격대(이 남자의 경우 102만원)로 입혔다.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의 회원들이 2열 횡대로 나란히 섰다. 남쪽 회원들이 관을 한 명씩 옆으로 옮겼고 북쪽 회원들이 한 명씩 이어 받았다. 북쪽 회원 6명이 모두 관을 들었을 때 그의 송환은 마무리됐다.
1999년부터 통일부가 북으로 보낸 민간인 시신은 84구였다. 북한에 알렸는데 거부하거나 가부를 밝히지 않은 주검이 4구(2002년 이전 2구, 2017년 2구)였다. 합동조사팀을 거쳐 통일부로 보고된 93구 중 통일부가 북한인으로 ‘인정’한 사체는 모두 88구가 됐다. 이념을 건넌 것은 다만 죽음(북한이 남한으로 내려보낸 시신은 지금까지 5구)이었다.
거부 교동대교 열세 번째 교각의 남자는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했다. 그의 관은 판문점 대신 화장장으로 실려 갔다.
현장 전문가들인 합동조사팀과 수사기관의 결론을, 사체를 직접 살피지 않은 통일부가 뒤집었다. 조사·수사 결과만으론 북한 주민인지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의 죽음을 전하고 인수 의사를 묻는 통지문은 북한으로 발신되지도 않았다.
통일부가 송환을 거부하자 수사기관은 남자가 중국인일 가능성을 재조사했다. 전국에 신원을 수배했으나 단서를 얻지 못했다. 중국대사관도 한국에서 실종된 자국 어선의 유족들을 탐문했다. 비슷한 변사자·실종자가 파악되지 않았다. 관계기관들은 결국 통일부의 ‘대북 인도 불가’ 입장을 따랐다.
매년 북한으로 올라가던 사체들이 2015~2017년엔 한 구도 돌아가지 못했다. 3년 동안 합동조사를 거쳐 통일부에 북한인으로 보고된 시신은 4구였다. 2015년 1구(교동대교 남자)와 2016년 1구(연평도 백로 서식지 앞 해상 발견)는 통일부에서 ‘북한인인지 알 수 없는 사체’로 결론(“조사팀 판단과 무관하게 통일부가 자체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김현권 의원실에 설명)이 바뀌었다. 2017년 2구(새 정부 출범 뒤인 8월 발견)는 북한에 통지됐으나 북한이 인수 절차를 밟지 않았다.
2015년 교동대교서 발견된 남자 등
군사·정보 전문가 판단을 통일부가
뒤집고 송환하지 않은 경우가 5구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발생
국내 무연고 사망자로 처리돼 화장
이 시기는 판문점 연락채널까지 단절(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이튿날인 2016년 2월11일~2018년 1월3일)되며 남북 긴장이 가장 가팔랐던 때였다. 군사·정보·수사기관의 조사 결과를 통일부가 받아들이지 않고 대북 인도를 거부(통일부 “상표 없는 속옷만 착용하거나 신발과 동전 등 근거가 되는 유류품이 부족했다”)한 사체는 지침 제정 이후 5구였다. 모두 2011년부터 2016년 사이에 인양된 주검들(11년 2구, 13년 1구, 15년 1구, 16년 1구)이었다. 파도에 실린 죽음이어서 넘을 수 있는 경계가 있었다. 죽었으므로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으나 북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정치에 따라 출렁였다.
“이명박·박근혜 두 정부가 송환하지 않은 북한 민간인 사체 5구의 처리 과정은 남북관계의 비극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 평화는 인도적 교류에서 출발해야 한다. 악화된 남북관계를 이유로 사체의 인도적 송환을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김현권 의원)
북한인에서 남한 무연고 사망자로
화장 2015년 8월25일. ‘교동대교 남자’는 인양 54일 만에 ‘주민등록번호 111111-1111111’을 부여받았다.
‘북송’의 길이 막힌 북한 민간인들은 국내 무연고 시신으로 화장됐다. 확인되지 않은 그의 신상정보는 ‘행정처리’ 과정에서 아라비아 숫자 1로만 구성된 번호로 임시 입력됐다. 번호는 화장 직전 한 차례 더 변경됐다. 남쪽 사람들에겐 생년월일을 뜻하는 주민번호 앞자리에 그는 발견 날짜(**0703-1******)를 새기고 화로로 들어갔다. 국내 무연고자가 됐으므로 그의 ‘죽음 값’은 75만원(무연고 사망자 처리 비용)이었다. 북한 민간인으로 통일부에 보고됐으나 남한 무연고자로 소각된 시신은 지금까지 9구(통일부의 ‘북한인 근거 불충분’ 판단 5명, 북한의 인수 거부 4명)였다.
바다만 아는 죽음이었다. 알 수 없고 아는 것도 금지됐던 땅에서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떠내려온 그들이 남쪽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처리됐다.
납골 뼛가루가 된 남자가 작은 나무상자에 담겨 무연고 납골당(인천가족공원 금마총)에 봉안됐다.
가로 20×세로 20×높이 20㎝ 상자들이 빽빽이 쌓인 ‘죽음의 퇴적층’ 틈에서 그는 인연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남쪽 사람들과 이웃(▶5회 ‘무연이 인연’)이 됐다. 그의 납골당 입주 6개월 뒤 연평도 백로 서식지 앞 해상에서 발견(2016년 1월4일)된 남자가 인양 47일 만(2016년 2월19일)에 화장돼 도착했다. 남한 사람들은 구할 수 없는 ‘노동화’(북한 제품)를 신고 중국제 손목시계를 찬 모습으로 그는 물에서 나왔다. 합동조사팀이 북한 사체로 ‘단정’했으나 통일부가 ‘증거 부족’이라며 송환하지 않았다. 1년8개월 뒤(2017년 10월24일)엔 인천의료원 안치실을 시체 냄새로 물들였던 여자(북한이 인수 거부)가 납골당 벽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와 인사했다.
도시의 찬란이 고층으로 깎아지를수록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도 깊어졌다. 허리 꺾인 땅의 시간이 길어지고 분단을 다루는 행정이 복잡해질수록 접경지를 품고 사는 도시엔 ‘불타 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여갔다. 그 이야기의 무덤 아래 ‘돌아가지 못한 자들’이 묻혀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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