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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인보고서-625전쟁과 이념(2008120024 행정학과 민희정)

forever1 2008. 6. 24. 14:32

<쟁점한국현대사 개인보고서>

         주제: 6․25전쟁과 이념

 

 과목: 쟁점한국현대사

담당교수: 이경란 교수님

제출자: 2008120024 

행정학과 민희정

                                                                                                                                

  Ⅰ서론 

 -6․25전쟁을 주제로 선정한 이유

  Ⅱ본론

1. 6․25전쟁에 대한 이해

2.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6․25전쟁 -토론형식으로

①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②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③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시민

3. 내가 바라본 6․25전쟁

  Ⅳ결론

 -다양한 관점에서 6․25를 바라본 감상 

 

 

 

  





Ⅰ서론 

-6․25전쟁을 주제로 선정한 이유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일제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큰 대립보다는 합작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후,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과 북에 진주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게 됩니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우리민족은 이념대립을 이유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는 6․25전쟁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우리는 분단의 상태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간의 전쟁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많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고 작가들은 이 같은 사회상황을 그린 수많은 문학작품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민족인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렇듯 분단의 원인이었던 6․25전쟁과 이념대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번 개인보고서의 쟁점을 6․25전쟁으로 정하고 개인적으로 설정한 인물들의 관점(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소시민)에서 이념문제를 함께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6․25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에서 이를 바라본 후, 현재를 살고 있는 저의 관점에서 6․25전쟁과 이념대립에 대한 생각을 서술해보겠습니다.

 

 

Ⅱ본론

 

1. 6 ․ 25전쟁에 대한 이해

 

 6 ․ 25전쟁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패망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단정책에 의해 비롯된 전쟁으로 미소냉전의 첨예한 대립 국면에서 북한 공산정권의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와 모택동의 지원 하에 1950년 6월 25일 기습적으로 38도선을 돌파 남침한 것을, 한국과 참전국이 함께 개전 초기에 북의 공격을 막아내어, 우리가 공산화되는 문턱에서 북의 의도를 좌절시킨 전쟁이라고 평가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강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 · 소 양군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었습니다. 분할된 상태에서 강대국들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대해 한국 국민의 맹렬한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뒤에 좌파세력이 찬탁으로 선회함에 따라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한반도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처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2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 성과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1947년 9월 미국은 마침내 신탁통치 실시를 전제로 한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종래의 정책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제기하였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정부가 수립된 뒤 미 · 소양군은 철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사령관은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출입을 저지함으로써 남북한총선거는 좌절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유엔총회에서는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같은 해 5월 10일 남한 전역에서 선거가 실시되었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실시하여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제3차유엔총회는 남한만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하였으며, 이로써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된 북위 38˚선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긴장된 냉전체제의 경계선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1946년부터 소위 '민주기지론'을 주장하여 북한을 공산체제로 만들고, 소련의 계획과 지원 하에 북한의 모든 역량을 전쟁준비에 동원하였습니다. 1945년과 19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남침계획을 설명하고 전차 및 야포 등의 지원을 스탈린으로부터 받아냈고, 중공군에 편성된 한인 약 4개 사단의 병력을 북한군에 편입시킨데 성공하였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6 25전쟁 발발 당시 소련제 전차 등 최신예 장비로 중무장되었고, 중국내전을 통해 전투경험이 축적된 막강한 전투인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일성은 국외정세의 변화에 고취되어 무력통일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6 25전쟁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발발된 것이 아니라 북한의 치밀한 사전 준비에 의한 계획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남한의 군사력은 상대적 열세에 있었습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이후 국군은 제 2차 세계대전시 미군이 사용하던 노후화된 경장비 위주로 무장되어 있었고, 전차나 대전차 화기가 전무한 상태에서 공비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전술훈련도 실시하지 못한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북한과의 힘의 균형에서 열세라고 판단한 한국정부는 전차, 항공기 등의 무기지원을 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으나,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며, 주일미군의 해 공군력으로 북한의 침략을 억지할 수 있다는 미국의 판단으로 인해 거절당했습니다. 따라서 한국군은 겨우 국경을 경비하고 내부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치안군 수준의 장비로 경무장되어 있었고, 한반도에서의 힘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남북한의 군사력 불균형은 전쟁 발발 초기에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서울은 북한의 기습남침 3일만에 함락되었고, 국군은 북한의 전차를 대전차 무기 하나 없이 맨주먹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침략자를 응징한다는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군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 3일 오산에 투입되었습니다. 스미스부대는 일본에서 점령군으로서 안일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전투부대로서의 훈련도 충실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급조되어 파견된 것이었습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이들 또한,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여 대전차 무기도 재대로 갖추지 않은 채 전투에 투입되어 막대한 손실을 당하였습니다.

미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북한군은 기세가 높아져 더욱 공세를 강화하였으나, 전투력을 재정비한 국군과 미군은 지연전을 전개하여 낙동강을 연하는 최후의 방어선인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였습니다.

북한군은 피난민으로 가장,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고, 특히 미군은 피난민과 북한군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피난민에 대한 공포심을 가질 정도로 피난민을 기피하는 현상을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총공격을 결사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재정비를 통해 반격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적의 후방을 차단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승기를 잡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한반도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유엔 결의안에 따라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100여만 명의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이 다시 피탈되고 탈환되는 과정을 겪었고, 6 25전쟁이 발발된 지 1년이 경과된 1951년 6월에는 다시 38도선을 중심으로 전 전선이 소강상태를 이루는 상황에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북한과 중국은 막대한 인력 및 국력의 손실로 전쟁 수행능력이 고갈된 상태에 있었고, 미국도 공산침략자를 응징하였다는 명분과 더 이상의 확전은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최초의 휴전회담이 개막되었습니다.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전쟁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거듭하자, 한국정부는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을 북한에 보낼 수 없다는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과 지원을 약속 받음으로써 전후 한국 안보에 대한 보장을 확보하였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이 중단되었으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고 민족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 25전쟁의 결정적인 요인은 먼저 국외적으로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1950년 1월 ③<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시킨다>는 D.G.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고, 1949년 말부터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무력침공계획에 관한 지원을 요청해오다가, 1950년 4월 ④<중국의 동의를 전제로 한> 전쟁지원 약속을 받아냈고 5월 마오쩌둥(모택동)의 지원약속을 얻어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또 국내적 요인으로는 ①남조선노동당의 실질적인 붕괴에 따라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공산당 내부의 민족해방을 위한 경쟁에서 ②김일성이 박헌영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③남한이 아직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을 뿐 아니라 ④한국군의 병력·장비가 상대적으로 열세하였기 때문입니다.

 

 6 · 25전쟁 기간 중 한국 정부의 요청과 유엔헌장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지원부대가 한국을 지원하여 참전하였습니다. 반면 중공군과 소련 공군 및 당시 동구권 국가의 의료지원부대가 북한을 지원하였습니다. 따라서 6 · 25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되어 20여개국의 전투부대가 이념을 놓고 격돌하는 국제전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인보고서의 쟁점인 6 ․ 25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당시의 사람들은 6 ․ 25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에 대해서 제가 설정한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2.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6․25전쟁 - 토론형식으로


토론의 주체 :  ①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②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③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시민


▷사회자

-사회주의이념을 가진 지식인과 자유주의이념을 가진 지식인, 그리고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시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6 ․ 25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6 ․ 25전쟁 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의 발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났다고 우리 국민 모두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국을 재건하기위해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를 건설하고 인민공화국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민을 위한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부푼 꿈에 들떠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잠시, 미국이라는 거대 자본주의 세력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미국은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사회주의 성향을 띠는 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그동안 친일을 해왔던 세력들을 처벌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일세력들을 다시 고용하기 시작했고, 친일세력들은 다시 친미세력으로 둔갑하여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있게 되었습니다. 민족적 배신자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이념 하에서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이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처럼 인민재판을 통해 친일파들을 깨끗이 청산했어야 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태도들은 우리가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주의 세력은 남한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통일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습니다.


▷사회자 

-해방 직후 미국의 통치에 대한 논의를 해주셨는데요,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께서는 미국의 통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이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 일제를 조국 땅에서 몰아낸 가장 큰 공신은 미국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서에 폭탄테러를 하고 일본 지도자를 살해한다고 해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 그 사실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김구선생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정규군인 한국광복군과 oss부대가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국토수복을 이루었다면 자주적 독립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겠지만, 전쟁에 뒤따르는 큰 피해 없이 독립을 이루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우리나라는 해방의 기쁨도 물론 있었지만 갑작스런 해방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혼란이 야기되었으므로 효율적인 통치가 요구되었습니다. 미국이 친일세력을 다시 고용하여 통치한 이유는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당시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훈련된 행정관리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독립함에 있어서도 그리고 독립 후의 사회적 안정을 이룩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북한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소련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카이로회담과 포츠담선언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았고,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 ․ 소 공동위원회의 합의를 통해 통일된 조국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비합리적인 태도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미 ․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고, 미국은 우리나라의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습니다. 이에 유엔에서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동시 선거를 통해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선거를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소련은 북한으로 들어가려는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공정한 선거를 통해 통일된 조국을 이룩할 수 있었음에도 소련이 나서서 우리조국의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입니다. 때문에 다시 유엔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서라도 국가를 수립하라는 결정이 내려졌고,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1948년 남한과 북한이 각각 다른 국가를 수립하게 되면서 분단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 미국의 통치에 대한 옹호발언과 함께 소련에게도 분단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을 덧붙여주시면서 소련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셨습니다. 분단과 함께 남과 북의 이념대립이 더 극심해 졌다고 볼 수 있고, 또 이로 인해 6․25전쟁이 발발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의 입장표명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 한반도 분단은 미군의 남한 ‘점령’ 탓이 훨씬 더 큽니다. 1945년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미국이 남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때부터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분단 고착화의 1차적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봅니다. 또한 해방 직후 남북한에 각각 진주한 미소 양국 군대의 포고령을 비교해 볼 때 소련군은 ‘해방군’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련은 북한에서 북한주민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를 대부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북한에서 실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해주었습니다.

 소련의 비합리적인 태도 때문에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미국과 소련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결과이지 소련의 비합리적 태도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엔총회에 한국의 문제를 상정한 것은 미국의 일방적인 처사였으므로 소련의 입장에서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서 먼저 국가를 설립했다는 점에서 분단을 자초한 것이 아닌지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 북한에서도 이미 단독국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훗날의 책임회피를 위해서 국가 설립 선포 늦춘 것 아닙니까?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시민

- 누가 먼저 국가 설립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은 남북한 모두 단독국가를 수립했고 분단은 지속되고 있으니까요. 저도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났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습니다. 일제패망 직후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됐을 때에도 그것을 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모두가 󰡒일본군의 항복 접수를 쉽게 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분할선을 설정했다󰡓고 설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 희망은 얼마 가지 않아 무참하게 짓밟혀버렸습니다. 38선이 그어진 지 3년 만에 미군이 점령한 남한엔 대한민국이 서고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섬으로써 분단은 고착화되었습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의 도움 없이 우리나라 스스로 독립에 성공했다면 이렇게 분단이 쉽게 고착화 될 수 있었을 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이 나서기 전에 일본이 항복해 버린 사실이 너무나 아쉽습니다. 김구선생의 계획대로 자주적인 독립을 이루었다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은 없었을 것이고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휘말려 민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사회자

- 전쟁 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6 ․ 25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 6 ․ 25전쟁은 북한의 준비 하에 이루어진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은 아직 사회 ․ 경제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전쟁을 할 만한 군사력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한을 침략했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 단독국가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남한의 적화통일을 주장하며 침략해온 것입니다.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

- 북한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38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6․25전쟁과 같이 전면적인 전쟁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남북한 모두 감지하고 있던 사항이 아닙니까?

그리고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고는 생각 안하시는지요? 미국은 애치슨 선언으로 유사시에도 남한을 도와주지 않을 것처럼 공산국에게 이미지를 흘렸습니다. 북한의 탱크사진, 155밀리 포탄을 미 군사고문관에게 보여주고, 소련에서 물자가 오고 있다는 자료를 계속 보여주는데도, 미 군사고문관은 남침은 안한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을 비롯한 장성들이 남침을 대비해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미국 쪽에서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또 6월 25일 4시에 북한이 공격해온다는 결정적인 제보를 보고 받은 미군의 군사고문단장이 낙성식 술파티를 제시하여 남한의 군사력을 취약하게 만드는 등 미국은 북한의 남한 침공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시민

- 남침을 유도했다고 해서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에 의문이 듭니다.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된 사회주의 국가를 이루고 싶어 할 만큼 이념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저는 이념 때문에 전쟁까지 치르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북한의 단독국가 수립이전 김구와 김규식이 추진했던 남북협상과 같은 방법으로 좀 더 신중히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해 볼 수 는 없었을까요? 성급히 단독국가를 세워 분단을 고착화 시킬 만큼 국가 설립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국가 수립 후에도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었던 문제였다고 봅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엄청난 인적피해와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 또 휴전협정을 맺고 교류가 중단되면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의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휴전협정으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불안감 속에 우리는 같은 민족에 대응하기 위한 국방력을 기르고, 미국에 더욱 의지하게 (어찌 보면 종속되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 지금까지의 토론에서 6 ․ 25전쟁의 배경과 그에 대한 인식 그리고 6 ․ 25전쟁에 대한 책임문제와 전쟁의 결과에 대한 언급들이 있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과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의 대화에서는 이념자체에 대한 대립보다는 다른 이념을 추구하는 나라에 대한 대립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이는 냉전이라는 흐름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이념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래의 목적이었던 이념을 잊고 다른 이념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대치를 벌이던 냉전시대의 상황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라고 봅니다. 이념에 신경 쓰지 않는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이념문제가 무의미하다는 것과 또 누가먼저이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6 ․ 25전쟁과 관련한 각자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6 ․ 25전쟁에 대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3. 내가 바라본 6․25전쟁

- 6 ․ 25전쟁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해방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우리민족은 38선을 경계로 한 미국과 소련의 분할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독립이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노력에 의한 독립이 아니라 외세의 도움에 의한 독립이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조금 늦게 항복을 해서 한국광복군과 oss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분할통치로 인해 분단이 일어나고 또 전쟁으로 인해 이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결과가 초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남한과 북한의 대립으로 이어져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6․ 25전쟁은 냉전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 의해 벌어진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6 ․ 25전쟁으로 한반도는 냉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냉전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기도 했습니다. 6 ․ 25전쟁과 이념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룬 소설은 최인훈의 ‘광장’일 것입니다. 광장에서 주인공은 남한과 북한사회 모두에 환멸을 느끼고 제 3국을 택하게 되는데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이념을 가지고 벌인 전쟁이 그다지 의미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북한이 처음에 주장했던 북침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나중에 주장한 남침유도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6 ․ 25전쟁을 벌인 것에 대한 정당화를 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 25전쟁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들과 지금도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Ⅳ결론

 -다양한 관점에서 6․25를 바라본 감상 

6 ․ 25전쟁은 이념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과연 6․25 전쟁이 이념 문제를 놓고 싸운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냉전시대에 다른 국가들이 그랬듯이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념에 따른 나라들과의 싸움이 아니었을까? 냉전이라는 것도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 소련편과 미국편으로 편을 나누어 하는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도 결국 이러한 냉전의 흐름을 반영하는, 또 냉전의 긴장감을 표출하는 전쟁이라고 느꼈고, 때문에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지식인의 관점이나 자유민주주의 관점을 가진 지식인의 관점에서 이념자체의 대립보다는 소련의 행위나 미국의 행위에 대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번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북한의 입장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북침설, 남침유도설, 미국책임설, 수정주의 등등 교과서에서 자세히 다뤄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었고, 남한만의 입장을 알고 있던 예전보다 시야가 넓어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윤흥길의 ‘장마’라는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임종의 자리에서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내 지난날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나도 마음속으로 할머니의 모든 걸 용서했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 우리나라도 지루한 장마를 끝내고 얼른 통일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자료

6 ․ 25를 배경으로 한 현대소설들 : 윤흥길 ‘장마’, 최인훈 ‘광장’

한국전쟁참전직업군인연맹-625와 한국현대사 카테고리 中 전쟁상황 1,2,3

한국전쟁의 미국책임론- 미국대외정책을 중심으로

바로잡아야할 우리역사 37장면 - 6․25를 다시 생각한다

사이트: http://defendgone.egloos.com/847294






출처 : 개인보고서-625전쟁과 이념(2008120024 행정학과 민희정)
글쓴이 : 행정08민희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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