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렛팩커드의 인간존중의 경영
초일류기업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핵심가치를 정립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전 임직원이 한 방향으로 힘을 결집할 수 있는 가치관을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평가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기업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고유의 경영방식인 ‘Way’혹은 ‘Value’라고 부른다. HP사의 ‘HP Way’는 GE의 ‘9 Values’, 존슨 앤 존슨의 ‘Our Credo’와 아울러 전세계 경영대학의 교과서에 모범사례로 소개될 만큼 유명하다.
HP Way란 무엇인가? 바로 HP를 경영하는 방식, HP사에 면면히 흐르는 강력한 기업문화를 지칭한다. 창업자인 빌 휴렛의 인본주의 경영철학인 “사람들이 좋은 일과 창의적인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신념하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탁월한 성과는 저절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HP Way의 기본 정신이다. HP Way의 구체적인 핵심가치는 개인에 대한 신뢰와 존경, 높은 수준의 성취와 기여, 정직성, 팀웍을 통한 공동목표의 달성, 유연성과 혁신 등이다.
이러한 HP Way는 1939년 빌 휴렛(Bill Hewlett)과 데이비드 팩커드(David Packard) 두 창업자에 의해 회사설립과 동시에 선포된 것은 아니다. 기술자였던 휴렛과 경영담당 파트너였던 팩커드가 창업이후 20년 동안 실천해 온 경영철학을 토대로 1957년 소노마회의에서 고위경영자들이 논의하여 1966년 완성되었다. “HP의 목표가 무엇인지 의견을 같이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같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도록 한다. 목표는 수익, 고객관심분야, 사원, 경영 및 시민의 역할로 요약된다.”며 목표 중심의 경영이념을 선보였다. 이는 경영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사원들은 이를 따르는 다른 기존 기업의 경영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임직원들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의사결정의 순간에 HP Way가 판단 기준이 되어왔다. 소노마회의에서 초기 벤처기업의 정신과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면서 그들의 경영방식과 목표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당시 직원이 1,200명을 넘어서면서 초기 경영방식에 애로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이 철학은 그냥 내버려둔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HP Way가 지켜지기 위해서 여러 제도들이 존재했다. 초대 관리자였던 팩커드는 목표관리(MBO)와 통제의 의한 경영(MBC: Management By Control)을 가장 기본으로 삼아 직장생활과 가사생활의 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했고 인간존중의 인사관리를 실천했다. 또한 순회경영, 이윤분배제도, 업무분담제도, 의료보험제도, 자율근무시간제도, 실험실 개방정책 등도 경영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대표적인 소프트웨어이다.
이 중 몇 가지 소개하자면, 먼저 개인의 신뢰와 존경이라는 기본적인 철학 구현을 위해서 두 가지 정도의 소프트웨어는 순회경영(MBWA: Management By Wandering Around)과 실험실 개방정책(Open Laboratory Policy)이다. 순회경영이란 관리자들이 사전에 계획된 일정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종업원들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종업원들도 언제든지 관리자를 방문할 수 있는 개방적 의사소통에 의한 관리 방법이다. 실험실 개방정책도 종업원들 특히 기술자들의 기술혁신에 대한 몰입을 제고시키기 위해 비싼 장치와 실험기기가 있는 실험실의 문을 항상 열어두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단기적인 비용을 들이더라도 장기적으로 효익이 있다는 믿음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 점은 투자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려 드는 다른 회사에 교훈이 되고 있다.
또한 업무분담제도는 불황시에도 해고를 시키지 않는 HP의 인간존중 철학을 실천하는 제도이다. 불황이 되어 일의 양이 줄어들 때 일부 종업원들을 해고시키지 않고 업무분담을 통하여 일이 없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일을 배분하여 수행하도록 하고 그 대신 급여를 적게 받는 것으로 고통을 모두가 분담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고통분담의 결과로 불황시에도 해고를 피할 수 있으며 다시 호황이 되었을 때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기업경영이 어려워지면 인력감축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면담을 거쳐 결정하며 본인이 원치 않을 경우 강제로 퇴사시키지는 않으며 가능하면 다른 나라에 있는 HP로 전환배치를 주선한다. 2차대전 때도 이러한 제도가 운영되었다. 기본적으로 어려울 때를 대비, 적은 수를 채용하되 일단 채용한 사람은 파산직전까지 함께 간다. 2백여 가지 정리한 직무기술서를 마련하여 정확한 포지션을 적용하며 결원이 생길 때 사내에서 충원하는 “Internal Job Posting” 제도를 운영한다. 사내채용이 불가능할 때는 외부채용에 나선다. 사람을 고르는 것은 각 부서가 주도권을 쥔다. 부서장이 1차 면접, 2차로는 해당부서 직원들이 지원자들과 집단면접을 한다. 함께 일할 사람들을 직접 고른다. 이 외에도 가족적이며 열과 성을 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임직원 모두가 자리를 같이 해서 서로 얼굴을 익힐 수 있도록 정례적으로 맥주파티를 열고 사업실적을 알려주기도 한다.
물론 HP도 90년대 들어서 철학과 기업구조에 부작용을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내부 지향적인 경영과 관료주의를 야기하였다. 130개의 독립적인 제품사업부의 단순한 집합체가 되었고 각 사업부는 공통분모를 가지기 보다는 각자의 재무목표 달성에만 급급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와 IBM이 닷컴 혁명의 전사로서 자신들을 마케팅하는 데 주력하고 있을 때 HP는 여전히 하드웨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에 루슨트 해외서비스부문 사장이던 피오리나가 CEO로 선임되었다. 영입발표날 HP주가는 2.68달러 상승했고, 루슨트는 1.87달러 떨어졌다. 취임날, “HP의 좋은 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바꾸자”며 개혁을 선언했다. 임원회의 장소를 본부 건물에서 연구동으로 옮겼다. 창조를 생명처럼 여겨온 HP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였다.
창업자 휴렛과 패커드의 엄격한 장인정신, 탁월한 벤처정신이 결합된 세계 기업사의 살아있는 신화로서 HP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합병이라고 불리워지는 컴팩과의 합병 이후 정보기술업계에 대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피오리나는 그간 그릇된 관습을 정당화시키는 변명의 구실 노릇을 해오며 HP Way을 곡해하는 모든 핑계꺼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격하였다. 결국은 HP Way를 계승하여 단기적 효과와 장기투자간의 균형, 일과 삶의 균형이라고 주장하며 다양성과 창조성 사이의 연관을 강조하고 있다.
글_이동훈(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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