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hip

십팔사략에서 배우는 인간경영

forever1 2007. 10. 3. 15:19

□ 십팔사략(一十八史略)에서 배우는 인간경영

 

 

◇ 경영자의 경영철학

공자가 가장 존경한 정치가는 주나라의 정승 주공단이다. 주공단은 정치가로서 올바른 행동철학과 경영철학을 터득하고 있었다. 주왕조는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의 3대에 걸쳐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그들의 창업을 도와준 것이 주공단(周公旦)이라는 명참모다.

주공은 무왕의 동생으로 3대인 성왕에게는 숙부뻘이 되는데, 어린 성왕이 군주가 되자 재상으로서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여 주 왕조의 기초를 다졌다. 훨씬 뒤에 공자가 이상적 정치가로서 숭배한 사람이 바로 이 주공(周公)이다. 또한 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 명참모역을 꼽을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도 역시 주공이다. 주공은 장년에는 공직을 인정받아 노(魯)라는 곳에 영지를 하사 받아 그 지방의 영주로 임명된다. 그러나 자신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수도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노(魯)에는 자기의 대리자로 아들 백금(伯禽)을 파견했는데,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주의를 하고 있다. "나는 무왕의 동생이고, 성왕에게는 숙부가 된다. 수많은 제후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신분이다. 그러나 나조차 다른 사람의 방문을 받으면 세면이나 식사를 중단하고 만나서 예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미흡한 곳이 있지 않을까, 우수한 인재를 몰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태산이다. 그대도 노에 가면 아무리 영주(領主)라 하더라도 결코 오만해서는 안된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어>에 의하면 그때 주공은 말을 이어 다음과 같이 자식을 깨우치고 있다. "알겠느냐? 위에서는 자는 첫째로 친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중신에게 자기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을 갖게 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옛날 친구는 웬만한 사정이 있는 한 버려서는 안된다. 넷째로 한 인간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된다." 지도자로서의 자질구레한 배려를 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적절한 훈계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주공의 정치란 구체적으로 보면 어떤 정치였을까?

 

백금(伯禽)은 노(魯)에 부임하고서 3년 뒤에 겨우 시정(施政)을 보고하기 위해 돌아왔다. "돌아오는 것이 너무 늦었구나." 주공이 이렇게 말하자 백금이 대답했다. "옛날 습관을 고치고 규범을 정리하고 3년 상(喪)을 지키도록 지도하려니까 이렇게 늦었습니다." 한편, 낚시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는 태공망(太公望)은 공적에 의해 제(齊)의 영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부임한 지 불과 5개월만에 시정을 보고하러 돌아왔다.

 

"너무 빠르지 않느냐?" 주공이 말하자 태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군신의 예를 간소하게 하고, 영민(領民)의 습관을 존중하는 정치를 하고 있으니 까요." 주공은 백금의 보고를 들었을 때와는 대조적인 태공망의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도대체 법령이 번잡하면 민중이 따라오지 않는다. 속박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중을 따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요체라 할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백금은 그 미묘성을 잘 모르고 있구나." 한마디로 간소하고 알기 쉬운 정치를 가리키는 것이다.

현대 행정과 정치의 문제 역시 간섭과 규제의 법규와 규제로 국가 경영의 어려움이 많다. 신속한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경영이 규제와 속박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위의 주공의 말처럼 민간 활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바로 정치철학의 기본인 것이다.

 

◇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

항우는 외강내유로 밖으로는 과격했으나 안으로는 결단력이 부족하여 실패한 인물이며, 유방은 외유내강으로 성공한 대표적 경우이다. 또한 항우가 자기 재능에 자신감을 갖고 연전연승 무적의 막강함을 자랑한데 비해, 유방은 유능한 부하를 얻어 집안의 힘을 발휘한데 성공의 원인이 있다. 진(秦)의 시황제가 죽은 뒤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서 진 제국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불과 15년만에 망해버렸다. 그 뒤에 천하를 양분해서 싸운 것이 초(楚)의 패왕(覇王)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 두사람이었다.

 

초와 한의 싸움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싸움은 처음에는 항우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유방은 고전의 연속으로 항우의 정예군단에 밀려 싸울 때마다 패배를 하고,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대결이 1년이 지나고 2년째로 접어들 무렵부터 서서히 형세가 변해갔다. 전술적으로는 여전히 항우측이 우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공격하고 있는 항우 측에 피로의 빛이 역력해지고, 오히려 공격을 받고 있는 유방 측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2년째를 지나서 형세는 완전히 역전한다.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유방 측이 우위에 서고, 항우의 열세는 뚜렷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항우는 사면초가의 상태에 쫓기게 되어, "우(虞)야, 우야, 너를 어떻게 할까?" 하고 우미인(虞美人)을 끌어안은 채 멸망해 갔다. 우세한 항우가 왜 멸망했을까? 열세에 놓여있던 유방이 어떻게 역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우선 첫째로, 유방 측이 항우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유방은 처음에 열세에 놓였을 때, 이미 그 포위망 구축에 착수했는데, 그것이 일년 뒤에 결실을 보아서 차츰 항우를 '보자기 속의 쥐'와 같은 상태로 몰고 들어갔다. 정치 전략의 승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유방 측이 모략공작(謀略工作)에 의해 항우의 진영을 이간시키고, 상대방의 군신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항우측은 조직으로서의 힘을 상실해 버렸다. 셋째로 보급문제에 있었다. 유방 측은 병참, 즉 후방의 원호체제가 건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원과 물자의 보급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진용(陳容)을 감추고 상대방의 결정타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항우 쪽에서는 보급 받을 수 있는 후방세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모한 신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열세로 몰려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전략전술면인 측면에서 보면 이상 세 가지를 지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보다도 승패를 좌우하는 포인트가 된 것은 두 지도자의 그릇의 차이였다. 유방은 항우를 멸망시키고 낙양에 개선했을 때 자신의 승인(勝因)과 항우의 패인(敗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영 안에 앉아서 계략을 꾸미고 승리를 천리 밖에서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나는 장량(張良)을 따라가지 못한다. 내정에 충실, 민생의 안정, 군량의 조달, 보급로의 확보라는 면에서는 나는 소하(簫何)를 따를 수가 없다. 백만 대군을 자유자재로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는 점에서 나는 한신(韓信)을 못 따른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영걸이라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인물들을 부릴 수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천하를 잡은 이유이다. 한편 항우에게는 범증(范增)이란 영걸이 붙어 있었는데, 그는 그 한사람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그것이 나에게 패배한 이유다."

 

여기서 유방이 거론하고 있는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은 하나하나의 능력을 비교해 보면 누구나 유방을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유능한 부하를 얻고 그 위에 그들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 유방의 승인이라는 것이다. 우선 첫째로, 부하의 의견에 귀를 잘 기울였다는 것이다. 유방이라는 사람은 지시나 명령 같은 것을 거의 내리지 않았다.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벽에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부하에게 의견을 구한 다음에 결단을 내린다. 이것이 유방의 자세였다. 두 번째 특성은 성공의 보수를 톡톡히 지불했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게 되면 당연히 전리품이 손에 들어온다. 유방은 그것을 단 한 푼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지 않고 모두 공적을 세운 부하에게 나누어주었다. 말하자면, 이익이 났을 때는 기분 좋게 모두 보너스로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부하로서는 자신의 의견이 채택되면 기쁘기도 하고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떻게든 성공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성공하면 그 노력에 걸맞은 보수가 약속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싫어도 노력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이러한 두 가지 방법으로 부하의 의욕을 끌어낸 것이 유방이었다.

 

항우라는 사람은 자기 재능에 만만한 자신을 갖고 있었다. 전투에 임하면 연전연승(連戰連勝), 무적의 막강함을 자랑했고 게다가 나이도 젊었다. 24세 때 군사를 일으켰고, 유방에 쫓겨 목숨을 잃은 것이 30세였으니까, 그가 활약한 것은 20대의 불과 몇 년 동안이었다. 지나친 자신감에 빠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 탓인지 부하의 진언 같은 것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언제나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전리품이 있어도 모조리 혼자 독점하고 부하에게 나누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항우는 유능한 부하를 차례로 잃고 고군분투한 꼴이 되었다. 요컨대 유방이 집단의 힘을 교묘하게 끌어내서 싸운 데 반해, 항우는 그것에 실패했다. 그 차이가 두 사람의 승패를 갈라놓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성공과 실패는 그 사람의 성격과 리더십에 달려있다. 기회는 훌륭한 리어의 편이라는 교훈이다.

 

◇ 재상의 역할

재상(宰相)은 자연의 음양조화를 살피고 모든 분야가 순리적으로 진행되도록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크게 생각하는 것이지 사소한 곳에 얽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황제의 임명을 받아 정치를 도맡아 하는 입장에 있다. 문무백관의 으뜸이고 정치의 최고책임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재상의 이상적인 자세는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이 나왔을 때 반드시 인용되는 유명한 얘기가 두 가지 있다. 우선 등장하는 것이 진평(陳平)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젊었을 때 유방을 섬기고 지모의 작전참모로서 유방의 승리에 공헌했다. 여섯번 특이한 계책을 써서 여섯번 유방의 위기를 구했다고 할 정도로 발군(拔群)의 머리를 가진 참모였다. 진평이 만년에 재상으로 임명되어 한 제국(漢帝國)의 뼈대를 짊어진다. 그 무렵 유방은 세상을 뜨고 젊은 문제(文帝)의 사내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문제는 진평과 또 한사람의 재상인 주발(周勃)을 불러들였다. 중국에서는 정책적으로 복수의 재상을 두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도 주발과 진평이라는 두사람의 재상이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먼저 주발 쪽을 보고 물었다. "재판 건수는 연간 얼마나 되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국고의 수지(收支)는 연간 얼마나 되는가?" "뵈올 낯이 없습니다. 그것도 자세히는 . . ."

주발은 솔직하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송구해서 등에 땀이 흠뻑 배었다고 한다. 문제는 할 수 없이 진평을 보고 같은 것을 질문했다. 진평이 대답하기를, "황송합니다만, 그런 문제라면 각 담당자에게 물어보십시오." "담당자라니 누구를 말하는가?" "재판에 대해서는 사법상, 국고의 수지에 대해서는 재무상입니다." "각기 담당하는 것이 있다면, 재상은 도대체 무엇을 담당하고 있느냐?"

"황송하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어리석은 줄을 모르시고 황공 하옵게도 재상에 임명하셨지만, 원래 재상의 임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의 조화를 도모하여 사계절의 운행을 순조롭게 하며, 밑으로는 만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있습니다. 또한 밖으로는 사방의 민족 및 제후를 진무하고 안으로는 만민을 순종케 하여 관리들에게 각자의 직책을 완수케 하는데 있습니다." "과연 잘 알겠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며 진평에게 칭찬의 말을 내렸다고 한다.

얼마 뒤 주발은 자신의 불명(不明)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사임을 하고, 그 후 진평은 혼자서 재상직을 맡아 나갔다. 그의 재상으로서의 활약도 문제에게 말한 것과 같은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여 직무를 맡기고, 본인은 '집오리의 물갈퀴'로서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여 나가도록 배려한다는 그런 자세이다. 그러한 진평을 당시 사람들은 명재상이라고 칭송했다.

서기관은 용기를 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병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난투사건을 취체하는 것은 장안의 영(도지사)이나 경조윤(京兆尹:경찰국장)의 직책이다. 재상은 일년에 한번 그들의 근무평가를 해서 상벌을 주청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재상은 자질구레한 일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노상에서 취체를 하다니 말도 안되는 짓이다. 소를 보고 마차를 멈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직 봄도 깊지 않은데 소가 허덕이는 것을 보니 날씨가 너무 덥지 않은가 걱정이 되어서이다. 재상의 직책은 음양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일부러 달구지를 세우고 물어본 것이다." 서기관은 그 말을 듣고 무식을 탓했다고 한다.

앞의 진평의 얘기에도 음양의 조화를 도모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옛날 중국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음과 양의 밸런스 위에 성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밸런스가 유지되어 있으면 평화롭게 치정을 할 수 있지만, 밸런스가 무너지면 이변이 생긴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음양의 조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그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도록 높은 곳에서 지켜본다는 뜻이다. 이상 두 가지 얘기를 종합해 보면, 재상에게 구해지는 자질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대국적(大局的)인 판단이다. 둘째로 전체적인 조정능력, 셋째로 적재적소에서 부하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으로 국가의 국무총리, 기업에서는 전무이사에 해당된다. 부분적인 것에 얽매이기보다 내치와 외교, 국민생활, 기후의 변화, 시대의 예측, 의식의 개혁, 문화창달, 인재발굴 육성교육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 지도자가 실패하는 이유

지도자가 유흥과 酒色(Wine and Women)에 빠지면 자멸의 원인이 된다. 절제와 자재에 힘쓰고 사명감을 갖고 국정을 걱정해야 한다. 자멸의 길을 간 역사 속의 인물 또한 그 원인을 살펴보면 욕망대로 모든 일을 처리한 데에 있다. 중국에는 폭군이 많이 등장하며, 인간이라는 동물의 처참함을 조금은 엿보게 해 준다. 중국 역사에서 폭군이라고 하면, 우선 손꼽히는 인물이 은(殷) 나라의 주왕(周王)이라는 사람이다.

'주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변설(辯舌)에 능하고 동작은 민첩하고 맹수를 손으로 때려잡을 만큼 괴력의 소유자였다. 머리의 회전이 빨라서 간언하는 신하 따위는 간단히 반박해서 두말을 못하게 했고, 자신의 비행(非行)은 그의 특기인 궤변으로 얼버무려 버렸다.' 이것을 보아도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혜택 받은 재질을 곧게 키웠으면 명군은 안되더라도 훌륭한 왕으로서 이름을 후세에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왕은 전형적인 폭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이유는 자기 컨트롤이 부족하여 항상 욕망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는 마음에 안 드는 신하를 죽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할 정도의 절대적 권력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저돌적으로 탈선해 버린다. 폭군이 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주왕은 단기( 己)라는 미녀를 탐애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세금의 징수를 엄히 해서 궁전에 재보와 곡물을 가득 채우고, 별궁을 확장해서는 그곳에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연을 벌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모두 단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연히 백성들 사이에서 불만의 소리가 높아갔다. 그러자 주왕은 형벌을 무겁게 하여 심한 탄압정책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신하 가운데는 보다못해 간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러나 주왕은 아랑곳없이 간하는 자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이미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주왕은 신하에게도 국민에게도 외면을 당하고 주(周)의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해 버렸다. 이 정도로 지독하지는 않아도 비슷한 얘기는 현대에도 끊이지를 않는다.

 

주왕과 같은 운명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는 끊임없는 자기 컨드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주왕과 같은 선천적인 폭군은 아니지만 치세(治世) 도중에 전락해서 모처럼의 업적과 명성을 날려 버린 황제도 적지 않다. 그 전형으로써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당왕조(唐王朝)의 현종(玄宗) 황제를 들 수가 있다.

현종은 당왕조의 6대 황제로, 그 치세는 44년에 이르렀다. 황제에 즉위한 것이 27세, 의욕이 충만하고 긴장감을 갖고 정치에 임했다. 그 결과, 치세의 전반에는 '개원(開元)의 치세'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시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써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현종은 본래 영매(英邁)한 인물로서, 지도자로서의 결단력도 뛰어났다. 그런 인물이 긴장감을 갖고 정치에 임하면 실패할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로, 훌륭한 참모들을 갖고 있었다. 현종은 그들의 의견에 자주 귀를 기울이고, 그들 또한 힘을 합해서 현종을 도와주었다.

이런 얘기가 있다. 요숭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날 요숭이 과장급의 인사에 대해서 주상(奏上)을 했을 때, 현종은 궁전의 지붕에 시선을 보낸 채 전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요숭은 황공해서 물러났다. 나중에 측근의 신하가 현종에게 이렇게 간했다.

"재상이 정무(政務)를 주장하고 있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만기(滿期)를 총람하시는 황제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태도였습니다." 그러자 현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짐은 서정(庶政)의 일체를 요숭에게 맡기고 있다. 국가의 중대사라면 모를까, 하급관리의 인사 따위로 일일이 심을 괴롭힐 필요가 있겠느냐?" 나중에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폐하는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고 계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휴(韓休)라는 완고한 재상이 있었다. 현종은 주연 같은 것으로 도를 지나쳤을 때에는 언제나 측근에게, "한휴가 알게 되면 곤란한 걸." 하고 신경을 쓰곤 했다. 어느 날 측근에 있는 자가, "한휴를 재상으로 삼고 나서는 폐하는 많이 야위셨습니다." 하고 은근히 한휴의 경질(更迭)을 암시했더니 현종은, "한휴 덕분에 짐은 말랐다. 그러나 천하는 살쪘도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처럼 뛰어난 참모들을 갖고 자신도 정신을 차리고 정치를 해나갔으니, 훌륭한 시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현종은 치세의 후반이 되자, 마음이 태평하게 해이해져서 정치를 소홀히 하고 만사를 귀찮아했다. 긴장감을 상실한 현종은 오로지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보좌하는 재상에도 아첨하는 자나 무능한 자만을 등용하게 된다.

그 결과 정치의 근본이 흔들리고 이윽고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나서 당왕조는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지도자인 현종이 긴장감을 잃고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또한 남의 일이 아니다. 지도자가 긴장감을 상실하고 무사 안일한 경영을 하면 당장 조직은 붕괴의 위기를 맞이한다.

 

◇ 명참모 한신과 소하

초 한지의 유방에게는 한신이라는 전략가가 있었고, 소하라는 행정가가 있었다. 유방은 한신의 공로보다 소하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한신이 젊었을 때 떳떳한 직업을 얻지 못하고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보내고 있을 무렵, 부랑배에게 길거리에서, "야, 목숨을 내던질 베짱이 있으면 나를 찔러봐라. 그것이 무서우면 내 바지가랑이 밑을 지나야지." 하는 시비를 당했다. 한신은 한참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땅바닥을 기어 가랑이 밑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이다.

'못할 짓을 참고하는 인내'의 좋은 예로 옛날 수신(修身)교과서에도 실렸었다. 한신은 백만 대군도 자유자재로 지휘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만큼 용병의 재능을 타고났던 것이다. 그의 천재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배수(背水)의 진(陣)이라는 고사이다. 유방과 항우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한신은 유방의 명을 받아 북방의 전략을 맡았다. 북방에서 멀리 우회해서 항우의 배후로 돌아나가 대포위망을 구축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때 한신은 20만의 적과 조우(遭遇)했다. 더구나 상대는 견고한 요새를 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에 비해 한신의 군사는 겨우 1만명, 게다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군에 불과했다. 제대로 맞붙어 싸웠다가는 승산이 없다. 한동안 생각하고 있던 한신은 적의 요새 앞을 흐르고 있는 강을 등지고 포진했다. 그것을 안 적군은 병법의 초보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적은 당연히 우격다짐으로 공격해 왔다. 한신의 군세는 강을 등지고 있으니 그 이상 도망갈 수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자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정신 못 차리게 싸우고 있는 동안에 어느새 적의 대군을 격파하고 멋진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싸움이 끝난 다음 수하의 장군들이 "병법에는 산을 등지고 강을 앞에 놓고 싸우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는 강을 등지고 싸우면서 대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 하고 물었더니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병법이다. 그 증거가 '스스로를 사지(死地)에 놓아야 비로소 살 수 있다.'고 병법에도 있지 않느냐? 그것을 응용한 것이 이번의 배수의 진이다. 아무리 보아도 우리 군대는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군이라서 그것을 생지에 놓았다가는 뿔뿔이 해체되어 버릴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지에 놓아본 것이다."

 

장군들은, "탄복했습니다. 저희들이 미칠 바가 못 됩니다." 하고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사지(死地)라는 것은 죽음 이외에 다른 길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손자병법>에도 병사를 결사적으로 싸우게 하려면, 사지에 놓으라고 했는데, 한신의 배수의 진은 그것을 응용한 것이었다. 정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병법의 정석에 입각해 있었다. 정석을 머리속에 넣고 그것을 임기응변으로 구사하는데 한신의 천재성이 있다.

 

한신 이상으로, 유방의 승리에 공헌한 자가 소하라는 승상이었다. 그는 한신과는 달리 한번도 싸움터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후방에 머물면서 나라의 경영을 맡아 전진에 있는 유방에게 병사와 물자를 계속 보내주었던 것이다. 유방이 패배를 거듭해도 전선을 다시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소하의 활동에 힘입은 바다. 후방근무라는 것은 눈에 띄지 않고 생색도 나지 않는 일이다. 공성야전(攻城野戰)의 공적에 비하면 화려함이 없고,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유방은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그의 활동을 공적 제 1위로 인정하고 그 노고에 보답하였다. 소하가 공적 제 1위로 인정되었을 때 역전의 장군들은 모두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제일선에 서서 많은 사람은 백몇십회의 전투에 참가하여 싸웠습니다. 공적의 차이는 있겠지만 똑같이 성을 공격하고 적지를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소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싸움터에 나온 적이 없고, 주로 책상에 앉아 문서만 작성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우리들보다 더한 공적으로 인정받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 갑니다." 그때 유방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사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사냥개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

"알겠느냐? 사냥을 할 때 사냥감을 쫓아가서 잡아오는 것은 개지만, 개의 끈을 풀고 잡아오라고 명하는 것은 사람이렷다. 이른바 그대들은 도망 다니는 사냥감을 잡아 온 것뿐으로 공적이라 해도 개의 공적이니라. 그것에 비하면 소하는 그대들의 끈을 풀어 지시한 사람으로 곧 인간의 공적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역전의 장군들도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일을 완성하려고 하면 훌륭한 참모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유방에게 있어서 그 참모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소하였다. 소하는 최후까지도 일관해서 충실한 명참모로 그 생애를 마쳤다. 유방은 인물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적재적소에 활용한 영웅인 것이다.

 

◇ 명 군사 장량

 

유방의 명군사참모 장량은 장막 안에 앉아 장래를 내다보고 예측하며 미리 대비책을 세워 계략을 쓰는 일명 장자방으로, 꾀주머니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유방의 위엄을 도운 세사람의 거물 가운데 한 사람이 장량이라는 군사이다. 한신이 영업담당 중역, 소하가 총무담당 중역이라고 한다면, 장량은 기획담당 중역이라고나 할까? 중국 3천년 역사 가운데서 지모를 갖춘 군사라고 하면 먼저 거론되는 것이 바로 장량이라는 인물이다. 그런데 지모를 갖춘 군사라고 할 때에 신들린 것 같은 책략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아직 낮은 차원의 지모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지모란 닥쳐 올 위험을 미연에 예측하고 한 수 빨리 대책을 강구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모는 거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미처 깨닫기 전에 이미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장량이 갖고 있던 지혜도 사실은 이러한 지모였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유방이 숙적 항우를 멸망시키고 전후 논공행상이 행해졌다. 주된 공신 20명에 대해서는 결정을 보았으나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평정이 엇갈려 좀처럼 결정이 나지를 않았다. 그러한 어느 날의 일이다. 유방이 회랑의 이층에서 문득 뜰을 내다보니까 장군들이 여기저기에 모여 무엇인가 수근 거리고 있었다. 의아하게 생각한 유방은 뒤에 대령해 있는 장량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느냐?" "모르고 계셨습니까? 반란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 "천하가 안정되었는데 반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폐하는 일개 서민에서 몸을 일으켜 그들을 써서 천하를 장악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폐하가 천자가 되셨는데도 봉지를 받은 것은 소하를 위시해서 옛날부터의 총신들뿐입니다. 한편, 처벌을 받은 것은 모두 예전부터 폐하의 미움을 산 자들입니다. 지금 담당자가 각자의 공적을 평정하고 있습니다만, 필요한 봉지를 모두 합해보면 천하 전부를 나누어주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들은 폐하가 전원에게 봉지를 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과거의 실패를 핑계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것이 걱정이 되어 저렇게 모여서 반란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폐하가 가장 미워하고 또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인물은 없습니까?" "있지, 옹치에게는 옛날부터 원한이 있었지, 녀석은 나한테 몇 번씩이나 반항을 했거든. 차라리 죽이고 싶지만 공적도 많기 때문에 꾹 참고 있지." "그렇다면 우선 옹치에게 봉지를 주고 모두에게 그 사실을 발표하십시오. 옹치가 봉지를 받았다면 자연히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방은 주연을 베풀고, 옹치를 짐방후라는 영주에 임명하고, 그것을 기회로 담당관리를 독촉해서 논공행상을 서둘겠다는 것을 발표했다.

그 순간 장군들은 술을 마시다 말고 환호성을 지르며, "옹치조차 영주가 되었으니 우리들도 기대할 수 있다." 고 수근 댔다고 한다. 장량의 술책이 반란 일보 직전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한 셈이다. 대단한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막상 자신이 그러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효과적인 묘책을 그리 쉽게 생각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진짜 지모라고 할 수 있다.

장량은 대대로 한(韓)이라는 나라의 재상을 역임한 유서 깊은 명가의 출신이었다. 유방을 위시해서 신하의 대부분이 거의 최하층의 서민 출신이라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색적인 존재였다. 그런 때문인지 진퇴가 어딘지 모르게 매우 유연하다. 유방의 천하가 정해지자 깨끗이 현세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로지 몸을 가볍게 하는 도인술을 실행하여 선인수행(仙人修行)에 힘썼다고 한다. "나는 세치 혀로 제왕의 스승이 되고, 만 호의 영지를 배령해서 열후의 열에 끼어있다. 일개 서민으로 영력한 이 몸에게 그 이상의 영달은 없다.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는 속세를 버리고 옛날 선인처럼 선계(仙界)에서 노닐고 싶다." 가끔 대궐에 들어가 유방과 얘기를 할 기회가 있어도, 현실 정치에 관한 화제는 주로 피하고 오로지 옛날 얘기로만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유방은 황제에 즉위한 지 8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동안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에 온 힘을 쏟았다. 그때 모반의 혐의를 받고 주살된 공신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정치의 세계는 아직도 난세의 여운을 남기고 어딘지 소언해 있었다. 장량의 선인수행은 그러한 정치의 계절을 살아온 지모(智謀)의 군사가 취한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책략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 나라 실정에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 지도자의 그릇

항우와 유방의 대결은 유방이 일어선지 3년동안의 전쟁에 유방이 항우를 패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서 결말이 났다. 그렇다면 유방의 승인, 항우의 패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보급의 문제, 전략전술의 공출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지만 더욱 깊이 살펴보면 그릇의 차이가 두 사람의 승패를 갈라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음얘기를 살펴보자. 한신은 유방의 천하가 정하여진 뒤 모반의 혐의로 붙잡혀 초왕의 자리에서 회음후로 격하되어 유방의 감시 하에 두어졌다. 그러한 그가 모처럼 유방과 잡담을 나눌 때 학제가 장군들의 품격을 정하는 대로 옮겨졌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방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허면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병을 거느릴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신은 대답했다. "폐하는 기껏 10만 정도일 것입니다." "허면 그대는?" "저는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더 잘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에게 붙잡혔는가?"

한신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폐하는 병(兵)에 장(將)다운 힘은 없습니다만, 장에 장다운 힘은 가졌습니다. 제가 붙잡힌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거기에 폐하의 경우 그 재능은 천성의 것이라 할 것으로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병에 장의 그릇이 아니라, 장에 장의그릇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한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약간 유방에게 아부한 면도 없지는 않으나 적어도 반 이상은 거짓 없는 실감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유방이란 그러한 사람이었다.

한편, 항우는 어떠한가. 이미 그 일단을 소개한 바와 같이 전투에 임하면, 무적의 강력함을 발휘했다 싸움의 천재라고 말해도 좋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릇으로 볼 때는 몇 가지 중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신으로 말하더라도, 유방의 참모로 활약한 진평으로 말하더라도 모두 처음에는 항우를 섬겼으나 그를 단념하고 유방 쪽으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지만 그들의 항우 평은 모두가 엄하다. 먼저 진평인데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항우라고 하는 사람은 부하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가 중용한 것은 모두가 자신의 일족이거나 처와 핏줄이 닿는 자들뿐으로 배하에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려 하지 않았다."

한신의 지적은 한층 더 신랄했다. "항우가 일성 질타하면 부하는 모두가 그 앞에 엎드렸지만, 그는 유능한 인물이었어도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이래가지고는 용기가 있다고 해도 필부의 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항우는 부하에 대해서 대체로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말씨도 공손하며, 가령 부하가 병이라도 걸리면 그야말로 자신의 식사도 나누어 줄 듯 하는 마음 쓰임이 있었다. 그러나 반면 부하가 큰 공을 세웠어도 거기에 알맞은 성공보수를 내주는데 인색했다. 이래 가지고서는 마음 쓰임이 있다고 해도, 필경 부인의 인에 지나지 않는다."

 

유방과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것이었다. 한신, 진평이하 유능한 인재가 속속 달아난 요인은 이것이었다. 사마천도 항우가 하나의 영웅임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결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공적을 자랑삼았고, 사사로운 생각에 흘러 공정하지 못한 지혜를 버리고 옛 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았다." 자신의 공적을 코에 걸고, 자기 하나만의 지혜를 믿고 역사의 교훈에서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연 역사가다운 지적이라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