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간 존중의 의미
인간은 존엄하다. 누구도 인간을 함부러 죽일 수 없으며 이유없이 가혹하게 다룰 수 없다. 국가 간의 분쟁에서 자국민이나 외교관이 납치되었을 경우,국가는 자국민을 구해내기 위해서 가장 큰 손실을 감당하기도 한다. 수천억원이나 하는 스텔스 전폭기가 고장났을 때, 전폭기를 구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하더라도, 조종사의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전폭기를 버리고 탈출하는 조종사를 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이기에.
왜 인간은 존엄한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소중한가? 생각해 보자. 사실 조종사 한 사람을 살렸을 때 얻는 이익이 수백억 짜리 전폭기를 살리는 것보다 더 큰가? 조종사 한 사람을 기르는 데 드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스텔스기 한 대의 가격보다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수백억짜리 비행기를 버리고 수억도 들지 않은 인간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바보같은’ 판단을 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는 인간은 왜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치 있기 때문에 라고 답하는 순환논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 존엄성은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가치이다.
2.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여러 견해
인간 존엄성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먼저 사회에 유지와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찾아 보자. 이런 입장을 인간 존엄성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을 존중할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안심하고 사회 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 예컨대, 군인이 전투를 하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실, 전투 현장에 있어 부상자처럼 처치 곤란한 애물덩어리들도 없다. (오죽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부상자로 만들어 적을 골탕먹이는 발목지뢰를 만들었겠는가!) 그래서 부상자들이 생기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거나 내버리고 간다고 해보자.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싸우는 도중에 부상을 입으면 죽을 것이 뻔한데 왜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반면, 단 한 명의 아군 포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해든지 구출하고 부상자를 목숨을 걸고라고 후송하려하는 군대에서라면-그리고 사망했을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해 명예를 기리고 그의 가족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군대에서라면- 군인들은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울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회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면 화가 나서 상대방을 죽인다해도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된다면 국가 인구가 너무 많아 실업자 문제가 심각할 경우 심지어 수만명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릴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도대체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이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살지도 못하고 원시 상태처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협에 시달린다면 사회가 있을 필요가 없다. 인간 존엄성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불안과 초조 속에서 ‘적과의 동침’을 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 자체에 존엄한 속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과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입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물에 빠졌을 경우, 그리고 구하려다가 자칫하면 구하려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든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 아이가 보잘 것 없는 거지였던 데다가 불구자였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에도 왜 이 아이를 구해야 할 '당위'가 있는가?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경우 왜 우리는 비난하는가? 이 아이가 살아 남았다고 해도 사회와 나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인 이상 살려내야 한다고 믿는다. 현실주의적 견해는 여기에 대해서 효과적인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것같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단순히 '생존'에 범주에서 찾기 보다는 여타 존재와 다른 인간의 속성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제일 먼저 제시할 수 있는 인간만의 속성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Homo sapiens-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에 존엄하다.
-뇌가 죽은 생각하는 존재의 존엄성문제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며 만물 중에서 제일의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존엄의 근거가 단순히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범위가 넓다. 개를 보자. 개들도 사람처럼 다른 개들을 질투하고 서로 싸우며 꾀를 부린다.심지어 군견 훈련소에서 훈련 받는 개들은 조교의 눈을 피하여 얼차려를 피하기 까지 한다고 한다. 개들도 생각 한다. 그렇다면 개들도 존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최근에 개고기 논쟁도 이 주장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면 우리는 인간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들 모두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심지어 바퀴벌레까지도! 바퀴벌레도 위험을 느끼고 도주를 하는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독도 한 복판에 개가 목말라 죽어 가고 있을 때 사람이 그 지경에 이른 경우만큼 급박하게 119구조대를 급파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똑같이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개는 구하지 않고 사람만 구하려 하는가?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 가지고 존엄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고도의 사유 능력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그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최근의 인공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t) 연구 성과를 보자. 몇 십년 안에 기계가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조금 더 있으면 기계에 자아 개념까지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컴퓨터가 모든 점에서 인간 보다 뛰어나 졌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인간 보다 뛰어난 사유 능력을 가지고 더구나 자신이 누군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느낄 수까지 있게 된 컴퓨터. 그렇다면 인간이 컴퓨터보다 더 존엄한 존재라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또, 컴퓨터가 자기 보다 못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이유를 컴퓨터가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것들에게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되는 궤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인류가 처음으로 부딪힌 문제가 아니다. 덜 발달한 문명 상태에서는 자기 부족 외에 사람들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미국에서 흑인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많은 문명권에서 여성을 권리-의무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았듯이. 그러나 흑인이 사람인 이유, 여성이 시민인 이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데 있었다. 앞서의 문제도 이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인간의 특성을 이성 기능 가운데서도 ‘반성적 기능(reflection)’에서 찾았다. 즉,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행동과 삶의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존재다. 이 것은 근대 사상사를 특징짓는 주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 것은 많은 문제를 낳았는데,(최근에 포스트-모던( post-modern)의 사조가 이에 대한 반발인데 여기서는 길게 다루지 않겠다. 문명비판 단원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살펴볼 뇌사와 낙태, 안락사의 문제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뇌사의 문제 -뇌가 죽은 반성적 존재의 존엄성
현대의 의학은 죽음을 아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7세기의 ‘하비’는 순환계 발견을 기초로 심장을 비롯한 순환기의 정지가 죽음이라고 정의했다. 뇌가 멈추면 심장이 멈추었고, 심장이 멈추면 뇌파가 곧 사라졌으므로 '반성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시체의 구분은 너무도 명료했다.
그러나 60년대에 고안된 생명 유지 장치는 죽음의 기준을 모호하게 했다. 이 장치로 말미암아 뇌가 죽은 이후에도 인간의 심장을 계속 뛰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뇌사자는 과연 죽었는가, 살았는가? 심장이 뛰고 순환기가 작동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들은 분명 살아 있다. 그러나 ‘반성적 존재’로 인간을 본다면 이들은 결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심장이 뛰고 있는 살코기들-시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 아닌 살코기를 이용한다고 해서 그다지 죄스러울 건 없다. 이제 뇌사자의 장기(臟器)를 이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또, 그 사람에게서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기를 주저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그가 인간의 특징인 반성적 기능을 되찾을 가능성은 0%에 가까우므로.
그렇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낙태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종교인이 아닌 이상- 태아도 뇌파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생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아가 반성적 기능도 가지고 있을까? 그럴 것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는 낙태도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 나아가 안락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뇌사를 인정한 나라들에서 뇌사-낙태-안락사 논쟁이 차례로 일어나고 인정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이와 같이 동일한 철학적 기초 위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탓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라면, 위의 주장에 대해서 당연히 의문을 던질 것이다. '낙태는 뇌사와 다른 문제다. 뇌사자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태아는 결국 인간의 이성을 갖게 되는 가능적 인간이다. 따라서, 반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논증은 낙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그런 이유로 낙태를 반대한다면 뇌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응급 환자가 숨이 끊어 지는 그 순간까지 치료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사자에게도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그렇다면 그도 가능적으로는 반성적 존재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다는 것은 곧 모든 가능성을 끊어 버리는 살인 행위다. 뇌사와 낙태는 뫼비우스의 띠의 안쪽과 바깥 쪽처럼 한 면을 인정하면 다른 면도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그런 관계다.
또 하나 짚어 보아야 할 문제는 인간 육체의 지위이다. 인간의 특징을 반성적 기능에서 찾을 때 육체는 어디 있는가? 동물이 죽었을 때 그 고기로 요리를 한다고 크게 문제될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시신으로 요리를 하면 그건 범죄행위다. 그 근거는 어디 있는가? 이성이 없는 데 그 존귀함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또, 어느날 사람의 장기와 신체를 모두 합성해 내고 대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 경우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인공 피부를 칼로 베었을 때 이 것은 상해죄에 해당하는가 재산 손괴죄에 해당하는가? 상해죄에 해당한다면 이 정의 밑에는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졌다는 철학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뇌사자의 장기 이식은 불가능하다. 육체가 인간의 영역에서 배제되었을 때야만 살아있는, 뇌사자의 장기이식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옹호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영혼을 인간으로 보는 고대의 전통 속에서 현대 문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homo potentia-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이 가진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구상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동물도 자신의 본능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알고 이를 뛰어 넘을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보라. 불과 100년 전 까지만 해도 뉴욕에서 보낸 편지가 수시간 안에 서울에 도착한다는 것은 웃기는 소리였다. 그러나 현대의 컴퓨터 기술은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줄 안다. 또한,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물음을 던질 줄 안다.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어떤 원숭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그 어떤 원숭이도 바나나의 본질을 탐구해 본적 이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기원과 근거 삶의 목적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간다. 말하자면, 인간은 신이다. 여타의 다른 자연물이나 생물들처럼 주어진 한계 속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창조하고 의미지우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여기도 또 다시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회의하고 창조하기에 위대하고 존엄하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인류는 존중받을 만하다. 그러나 개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어떤가? 개개인으로서의 인간도 존중받아야 하는가? 정박아의 경우를 보자. 정박아의 경우 아이큐는 경우에 따라서는 닭의 아이큐에 미달할 경우도 있다. 이 정박아에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는가? 닭보다 못한 아이큐를 가지고도 정박아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침팬치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 가능성이 없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여기에 대해서 정박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므로 죽이자고 강하게 외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말 생각이 없는 말이다. 세상에는 한 사람의 천제가 있다면 약 100명의 가능성있는 사람과 1000명의 침팬치 수준의 인간, 그리고 약 10000명의 닭같은 사람들이 있다. 가능성이 없다고 죽인다? 그러면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인류가 진보한 어느날, 인간으로서의 커트라인이 상향조정되어 지금의 대학 입시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 아님’판정을 받고 죽을 가능성은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교통사고가 나서 불구자가 되어 가능성을 잃어 버린 경우, 이 사람도 이제 인간이 아니어서 돼지 우리로 가야 하는가? 또, 똑똑하고 유망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적은 반면, 우매한 자들은 다수다. 가능성으로 인간을 정의 내린다면 본의 아니게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독재를 옹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존엄한 것은 가능성이 큰 소수이며 다수는 그만큼 덜 존엄한 존재라는.
유전자 검사의 문제-가능성 없는 인간의 존엄성
...가능성으로 인간을 정의내리려 할 경우 또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전자 검사’의 문제다. 유전자 공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많은 유전적 질환을 밝혀 내고 있다. 얼마전 신문에서는 심지어 공부를 잘하게 하는 유전자까지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의 노력이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측면도 더 많다. 유전자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40세 무렵의 대머리가 될 것인지의 여부, 50살 경에 암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 60살 무렵에는 19살 처녀와 바람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까지도 밝힐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잡초를 솎아 내듯 유전자 검식을 통하여 ‘범죄형 유전자’, ‘질병형 유전자’를 거세할 수 있다. 이는 분명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검사가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치료 불가능한 유전 질환에 걸려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질병은 35세에 발병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어느 직장에서 받아주고 누가 이 사람과 결혼하려 하겠는가? 유전자 검사는 인간의 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으로 가능성을 완벽하게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인간은 존엄하다. 누구도 인간을 함부러 죽일 수 없으며 이유없이 가혹하게 다룰 수 없다. 국가 간의 분쟁에서 자국민이나 외교관이 납치되었을 경우,국가는 자국민을 구해내기 위해서 가장 큰 손실을 감당하기도 한다. 수천억원이나 하는 스텔스 전폭기가 고장났을 때, 전폭기를 구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하더라도, 조종사의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에는 전폭기를 버리고 탈출하는 조종사를 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이기에.
왜 인간은 존엄한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소중한가? 생각해 보자. 사실 조종사 한 사람을 살렸을 때 얻는 이익이 수백억 짜리 전폭기를 살리는 것보다 더 큰가? 조종사 한 사람을 기르는 데 드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스텔스기 한 대의 가격보다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수백억짜리 비행기를 버리고 수억도 들지 않은 인간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바보같은’ 판단을 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는 인간은 왜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치 있기 때문에 라고 답하는 순환논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인간 존엄성은 사회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가치이다.
2.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여러 견해
인간 존엄성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먼저 사회에 유지와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찾아 보자. 이런 입장을 인간 존엄성에 대한 현실주의적 견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을 존중할 만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안심하고 사회 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 예컨대, 군인이 전투를 하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실, 전투 현장에 있어 부상자처럼 처치 곤란한 애물덩어리들도 없다. (오죽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부상자로 만들어 적을 골탕먹이는 발목지뢰를 만들었겠는가!) 그래서 부상자들이 생기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거나 내버리고 간다고 해보자.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싸우는 도중에 부상을 입으면 죽을 것이 뻔한데 왜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반면, 단 한 명의 아군 포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해든지 구출하고 부상자를 목숨을 걸고라고 후송하려하는 군대에서라면-그리고 사망했을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해 명예를 기리고 그의 가족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군대에서라면- 군인들은 목숨을 바쳐 적과 싸울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회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면 화가 나서 상대방을 죽인다해도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된다면 국가 인구가 너무 많아 실업자 문제가 심각할 경우 심지어 수만명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릴 수도 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도대체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이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살지도 못하고 원시 상태처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위협에 시달린다면 사회가 있을 필요가 없다. 인간 존엄성이 무너진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불안과 초조 속에서 ‘적과의 동침’을 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 자체에 존엄한 속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과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입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물에 빠졌을 경우, 그리고 구하려다가 자칫하면 구하려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든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 아이가 보잘 것 없는 거지였던 데다가 불구자였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에도 왜 이 아이를 구해야 할 '당위'가 있는가?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경우 왜 우리는 비난하는가? 이 아이가 살아 남았다고 해도 사회와 나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인 이상 살려내야 한다고 믿는다. 현실주의적 견해는 여기에 대해서 효과적인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는 것같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단순히 '생존'에 범주에서 찾기 보다는 여타 존재와 다른 인간의 속성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제일 먼저 제시할 수 있는 인간만의 속성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Homo sapiens-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에 존엄하다.
-뇌가 죽은 생각하는 존재의 존엄성문제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며 만물 중에서 제일의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존엄의 근거가 단순히 생각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범위가 넓다. 개를 보자. 개들도 사람처럼 다른 개들을 질투하고 서로 싸우며 꾀를 부린다.심지어 군견 훈련소에서 훈련 받는 개들은 조교의 눈을 피하여 얼차려를 피하기 까지 한다고 한다. 개들도 생각 한다. 그렇다면 개들도 존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최근에 개고기 논쟁도 이 주장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러면 우리는 인간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들 모두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심지어 바퀴벌레까지도! 바퀴벌레도 위험을 느끼고 도주를 하는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들 중 누구도 독도 한 복판에 개가 목말라 죽어 가고 있을 때 사람이 그 지경에 이른 경우만큼 급박하게 119구조대를 급파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똑같이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개는 구하지 않고 사람만 구하려 하는가?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 가지고 존엄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고도의 사유 능력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그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최근의 인공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t) 연구 성과를 보자. 몇 십년 안에 기계가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조금 더 있으면 기계에 자아 개념까지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컴퓨터가 모든 점에서 인간 보다 뛰어나 졌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인간 보다 뛰어난 사유 능력을 가지고 더구나 자신이 누군지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느낄 수까지 있게 된 컴퓨터. 그렇다면 인간이 컴퓨터보다 더 존엄한 존재라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또, 컴퓨터가 자기 보다 못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이유를 컴퓨터가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면 그 것들에게 무엇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되는 궤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인류가 처음으로 부딪힌 문제가 아니다. 덜 발달한 문명 상태에서는 자기 부족 외에 사람들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미국에서 흑인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많은 문명권에서 여성을 권리-의무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았듯이. 그러나 흑인이 사람인 이유, 여성이 시민인 이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데 있었다. 앞서의 문제도 이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인간의 특성을 이성 기능 가운데서도 ‘반성적 기능(reflection)’에서 찾았다. 즉, 인간은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자기 행동과 삶의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존재다. 이 것은 근대 사상사를 특징짓는 주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 것은 많은 문제를 낳았는데,(최근에 포스트-모던( post-modern)의 사조가 이에 대한 반발인데 여기서는 길게 다루지 않겠다. 문명비판 단원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살펴볼 뇌사와 낙태, 안락사의 문제도 이것과 관련이 있다.
뇌사의 문제 -뇌가 죽은 반성적 존재의 존엄성
현대의 의학은 죽음을 아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7세기의 ‘하비’는 순환계 발견을 기초로 심장을 비롯한 순환기의 정지가 죽음이라고 정의했다. 뇌가 멈추면 심장이 멈추었고, 심장이 멈추면 뇌파가 곧 사라졌으므로 '반성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시체의 구분은 너무도 명료했다.
그러나 60년대에 고안된 생명 유지 장치는 죽음의 기준을 모호하게 했다. 이 장치로 말미암아 뇌가 죽은 이후에도 인간의 심장을 계속 뛰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뇌사자는 과연 죽었는가, 살았는가? 심장이 뛰고 순환기가 작동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들은 분명 살아 있다. 그러나 ‘반성적 존재’로 인간을 본다면 이들은 결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심장이 뛰고 있는 살코기들-시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 아닌 살코기를 이용한다고 해서 그다지 죄스러울 건 없다. 이제 뇌사자의 장기(臟器)를 이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또, 그 사람에게서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기를 주저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그가 인간의 특징인 반성적 기능을 되찾을 가능성은 0%에 가까우므로.
그렇다면 마찬가지 이유로 낙태도 정당화되어야 한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종교인이 아닌 이상- 태아도 뇌파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생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태아가 반성적 기능도 가지고 있을까? 그럴 것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는 낙태도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 나아가 안락사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죽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뇌사를 인정한 나라들에서 뇌사-낙태-안락사 논쟁이 차례로 일어나고 인정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이와 같이 동일한 철학적 기초 위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탓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따라온 독자라면, 위의 주장에 대해서 당연히 의문을 던질 것이다. '낙태는 뇌사와 다른 문제다. 뇌사자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태아는 결국 인간의 이성을 갖게 되는 가능적 인간이다. 따라서, 반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논증은 낙태를 정당화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지만, 그런 이유로 낙태를 반대한다면 뇌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응급 환자가 숨이 끊어 지는 그 순간까지 치료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뇌사자에게도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그렇다면 그도 가능적으로는 반성적 존재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다는 것은 곧 모든 가능성을 끊어 버리는 살인 행위다. 뇌사와 낙태는 뫼비우스의 띠의 안쪽과 바깥 쪽처럼 한 면을 인정하면 다른 면도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그런 관계다.
또 하나 짚어 보아야 할 문제는 인간 육체의 지위이다. 인간의 특징을 반성적 기능에서 찾을 때 육체는 어디 있는가? 동물이 죽었을 때 그 고기로 요리를 한다고 크게 문제될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시신으로 요리를 하면 그건 범죄행위다. 그 근거는 어디 있는가? 이성이 없는 데 그 존귀함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또, 어느날 사람의 장기와 신체를 모두 합성해 내고 대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 경우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의 인공 피부를 칼로 베었을 때 이 것은 상해죄에 해당하는가 재산 손괴죄에 해당하는가? 상해죄에 해당한다면 이 정의 밑에는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졌다는 철학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뇌사자의 장기 이식은 불가능하다. 육체가 인간의 영역에서 배제되었을 때야만 살아있는, 뇌사자의 장기이식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옹호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는 영혼을 인간으로 보는 고대의 전통 속에서 현대 문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homo potentia-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이 가진 가능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구상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동물도 자신의 본능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 알고 이를 뛰어 넘을 수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을 보라. 불과 100년 전 까지만 해도 뉴욕에서 보낸 편지가 수시간 안에 서울에 도착한다는 것은 웃기는 소리였다. 그러나 현대의 컴퓨터 기술은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처럼 인간은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줄 안다. 또한,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물음을 던질 줄 안다.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어떤 원숭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그 어떤 원숭이도 바나나의 본질을 탐구해 본적 이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기원과 근거 삶의 목적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간다. 말하자면, 인간은 신이다. 여타의 다른 자연물이나 생물들처럼 주어진 한계 속에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창조하고 의미지우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여기도 또 다시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회의하고 창조하기에 위대하고 존엄하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인류는 존중받을 만하다. 그러나 개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어떤가? 개개인으로서의 인간도 존중받아야 하는가? 정박아의 경우를 보자. 정박아의 경우 아이큐는 경우에 따라서는 닭의 아이큐에 미달할 경우도 있다. 이 정박아에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는가? 닭보다 못한 아이큐를 가지고도 정박아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침팬치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 가능성이 없어도 인간은 인간이다. 여기에 대해서 정박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므로 죽이자고 강하게 외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말 생각이 없는 말이다. 세상에는 한 사람의 천제가 있다면 약 100명의 가능성있는 사람과 1000명의 침팬치 수준의 인간, 그리고 약 10000명의 닭같은 사람들이 있다. 가능성이 없다고 죽인다? 그러면 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인류가 진보한 어느날, 인간으로서의 커트라인이 상향조정되어 지금의 대학 입시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람 아님’판정을 받고 죽을 가능성은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교통사고가 나서 불구자가 되어 가능성을 잃어 버린 경우, 이 사람도 이제 인간이 아니어서 돼지 우리로 가야 하는가? 또, 똑똑하고 유망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적은 반면, 우매한 자들은 다수다. 가능성으로 인간을 정의 내린다면 본의 아니게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독재를 옹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존엄한 것은 가능성이 큰 소수이며 다수는 그만큼 덜 존엄한 존재라는.
유전자 검사의 문제-가능성 없는 인간의 존엄성
...가능성으로 인간을 정의내리려 할 경우 또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유전자 검사’의 문제다. 유전자 공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많은 유전적 질환을 밝혀 내고 있다. 얼마전 신문에서는 심지어 공부를 잘하게 하는 유전자까지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의 노력이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지만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측면도 더 많다. 유전자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이 사람이 40세 무렵의 대머리가 될 것인지의 여부, 50살 경에 암에 걸릴 것이라는 사실, 60살 무렵에는 19살 처녀와 바람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까지도 밝힐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잡초를 솎아 내듯 유전자 검식을 통하여 ‘범죄형 유전자’, ‘질병형 유전자’를 거세할 수 있다. 이는 분명 필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검사가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치료 불가능한 유전 질환에 걸려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질병은 35세에 발병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어느 직장에서 받아주고 누가 이 사람과 결혼하려 하겠는가? 유전자 검사는 인간의 가능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으로 가능성을 완벽하게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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