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als(목표, 그 성취의 기술

내가 사장이다.(I'm the boss.)

forever1 2019. 12. 22.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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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장이다.(I'm the boss.)

 

몇 년 전 뉴욕(New York)에서 행해진 한 연구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각 분야의 상위 3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은 실적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태도(special attitude)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급료를 지불해주는 사람이 누구든 직업 생활 내내 스스로를 자영업자(自營業者, self-employed person)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회사의 소유주(所有主, owner)인 양 회사에 대해 책임감(responsibility)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을 개인 서비스 회사의 사장이라고 생각하라. 바로 자신이 스스로의 삶과 직업 생활의 전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곧 나이고 나의 지금 모습이 곧 나이며, 또 이 모든 것은 내가 이루었거나 이루지 못한 일에서 비롯되었음을 명심하라. 내가 바로 내 운명의 설계자(The designer of my destiny)이다.’ <목표 그 성취의 기술(Goals!)>에 나온 말입니다.

젊은 시절 참 많이도 들었던 주인정신(主人精神, master spirit)’과 통하는 말이라 생각이 듭니다. 주인정신을 가지게 되면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출근하고 청소도 하면서 소모품 하나까지도 아껴서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정신이 없다면 시간만 때우고 월급만 타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절약 정신은 고사하고 불량품이 쏟아져 나와도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인정신을 가지고 소유주처럼 행동하며 책임감을 가집시다. 그렇게 한다면 회사가 나날이 발전할 것이며 자기 자신도 점점 높게 성장할 것입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생각나서 백과사전에 수록 된 것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헤겔의 첫 번째 주저인 정신현상학(1807)은 난해함으로 악명 높은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고대로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사상사를 추상적으로 기술하는 책이기도 하고 한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원초적인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고양되는지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감각과 지각, 오성의 단계로 구분된 의식에서 시작하여 자기의식과 이성, 정신을 거쳐 절대정신에 이르는 과정이 다뤄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단순한 의식 속에서 자기의식이 움터 나오는 부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기 삶의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시적인 이야기로서, 정신현상학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인간이 어떻게 자기의식과 삶의 자유를 획득하고 실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한 사람이 어떻게 그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고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주인 됨과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그것을 원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난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의욕하고 욕망한다. 자신의 주인 됨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자기 의지대로 실현하고 관철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의지와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한에 있어 한 개인의 한계는 자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주인 됨은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임을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주장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주체들 간에 이른바 인정 투쟁이 벌어진다. 욕망의 자유를 놓고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으로서의 위신과 그것의 인정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헤겔은 이 싸움을 두고 목숨 건 투쟁이라고 했다. 싸움은 승자와 패자를 낳는다. 목숨 건 싸움이었기에 진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승자는 패자를 죽이지 않는다. 승자가 주인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승자임을 보장해줄 수 있는 패자가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자는 패자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그를 노예로 삼는다. 자기 옆에 노예가 있어야 승자는 자신의 주인 됨을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숨 건 인정 투쟁의 결과로 주인과 노예,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 뒤에 변증법이라는 말이 붙었는가. 그 까닭은 이렇다. 주인이 인정 투쟁에서 승리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인정은 자신의 승리의 증거로서 노예가 존재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싸움에서 진 노예는 주인에게 생명을 빚지고 노예로서 봉사하고 있지만, 문제가 생명이 아니라 인정이라면 오히려 그 인정은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곧 주인의 주인 됨은 전적으로 노예의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태가 벌어진다. 노예가 있어 옆에서 자기 말에 복종할 때에만 주인은 주인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인과 노예의 구분은 단 한 번의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시간이 흘렀다. 전쟁에서 이긴 주인은 노예의 봉사를 통해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었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받아 노동에 종사했고, 비록 저당 잡힌 목숨이지만 노동을 통해 생산에 종사함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왔다. 그가 경작하는 농작물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커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무를 하고 집을 지으며 그것들이 현실 속에서 쓸모 있는 것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 삶의 의미를 확보하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오로지 누리기만 했던 주인과 끝없이 노동에 종사하며 생산에 참여해온 노예는 이제 어떻게 되었는가.

한때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용기로 승자의 자리를 차지했던 주인은 오히려 나태하고 무기력한 정신이 되어 있고, 반대로 노동이라는 자기 도야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단련시켜온 노예는 주인이라는 자립적인 존재까지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된 의식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태가 되면, 주인은 단지 형식적인 자립성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고, 실질적인 자립성은 노동을 하는 노예가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어느덧 역전되어 있는 셈이다. 정신적 우월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노예가 이미 주인이고 주인은 어느덧 노예가 되어 버렸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이처럼 변화하고 역전되는 과정을 일컬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변증법이므로 이 역전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일 수는 없다.

 

20191222(동짓날)

글쓴이 소백산 끝자락에서 김 병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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