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교훈(lesson in history)을 잊지 말아야
‘역사는 반복 된다.(History repeats itself.)’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왜침으로 수 많은 우리 국민들이 죽었고 재산상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제대로 된 개선책 없이 살아가고 있기에 또 다시 그런 피해를 입고 했습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때, 수(隋)나라의 양제(煬帝)가 612년에 113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는 총사령관인 육군의 우문술(宇文述)과 해군의 내호아(來護兒)로 하여금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진격하게 하였으나 모두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였습니다. 특히 양제는 30만 명의 정예 부대를 편성했으나 이 역시 살수에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했습니다. 특히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대첩(薩水大捷)에서 격멸되고 패주하였습니다. 이후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은 두 차례나 더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수나라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답니다.
113만의 대군을 가지고도 고구려에게 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천하 무적의 명장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을 중심으로 국민들이 단결했기 때문입니다.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의 실패로 국세는 약화되어 수나라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당나라의 창건자 이연(李淵)에게 나라를 배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후 기원 645년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친히 40만 대군으르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의 용장 양만춘(梁萬春)이 안시성(安市城, 지금의 만주 해성의 동남쪽에 있음) 싸움에서 용전을 벌여 당군을 패배시켰답니다. 특히 당태종은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실명하고 패주하는 길에 고구려 침략을 후회하고,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더라면 나로 하여금 이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魏徵苦在, 不我有足行地) 하고, 고구려 민족은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민족임을 깨닫고 다시는 고구려 침략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하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이라는 내치에 힘을 써, 중국의 5천년 역사상 가장 정치가 잘된 정관정치(貞觀政治)를 수립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누였습니다. 그는 문장에도 비범하여 왕희지(王羲之)를 지극히 애호하여 보좌케 했답니다. 하지만 그는 양만춘의 화살을 맞은 다음부터 고혈압으로 고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합니다.
당태종 창건의 제1등 공신인 위징의 술회(述懷) 라는 시를 보면 인생감의기(人生感意氣) 공명수부론(功名誰復論)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생은 뜻에 살고, 뜻에 죽는 존재다. 사내 대장부가 서로 의기투합(意氣投合)하면 세상에 공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문제는 논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남자의 늠름한 의기를 예찬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이 변형 되어 ‘남자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받치고,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곱게 단장한다.’는 말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위징의 시에서 보듯이 영웅호걸, 귀비도 흘러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 민족이, 아니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면 화합과 단결로 힘을 길러야만 합니다. 그리고 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을 결코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중국이 아무리 큰 나라이고 핵을 가진 강한 나라이지만 우리의 선조인 고구려의 기상과 국력이 제압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속국처럼 굽신거리며 고개 숙인 외교와 정책을 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 말은 지금의 우리 위정자들에게 꼭 말하고 싶습니다.
2020년 7월 12일
소백산 끝자락에서 김 병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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