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hip

불황때 배우는 신 개성상인 리더쉽

forever1 2008. 3. 5. 17:10
우보경영의 대가 

고 허채경 한일시멘트 회장

“걸음이 더뎌도 내실부터 챙겨라” 


“이 사람아, 우리만 좋아서야 되겠는가. 남들 생각도 좀 해야지.”

1986년 서울 뱅뱅사거리에 18층짜리 사옥을 올린 허채경 한일시멘트 회장(95년 작고). 그는 자기 사옥을 ‘한일시멘트빌딩’으로 이름 짓지 않았다. 대신 우덕(友德)빌딩이라 지었다. 이유인즉슨 그 빌딩에 입주할 타사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우덕은 그의 공장이 위치한 충북 단양 우덕리에서 따온 그의 호이자 ‘친구의 덕’을 뜻하는 이름. 


현재 6개 계열사를 합쳐 1조2000억 원대 그룹 매출을 올린 한일시멘트의 저력은 바로 허 회장의 ‘인간 존중’ 정신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제 1961년 한일시멘트가 설립된 것도 당시 20여 명으로부터 공동 출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때 도움을 받은 대표적 지인이 같은 개성상인들인 이정림 대한유화공업 회장과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등이다.


한일시멘트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재계나 금융계에선 우량 기업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회사다. 부채 비율이 18%에 불과하고 44년간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여기에는 창업자 허 회장의 경영 철학이 녹아 있다. ‘걸음이 느려도 튼튼하고 꾸준한 보폭으로 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른바 ‘우보(牛步) 경영’이다.


70년대 초 한일시멘트가 탄탄대로를 걷고 있을 때 허 회장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뻗쳐 왔다. 금융이나 유통 등 신사업 진출 제의가 물밀듯 찾아왔던 것. 그때 허 회장의 입장은 단호했다. “기업이 이윤만 생각해서야 되겠나. 지금은 국가기간산업이 더욱 필요한 때다”며 일언지하에 자르자 참모들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는 게 한일시멘트측 얘기다.

유보율 2000% 알짜 경영 


덩치만 키우기보단 ‘내실’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 같은 돌다리 경영은 IMF 쇼크 때 오히려 사세를 키운 한일시멘트의 비결이다. 미래 리스크에 대비한 내부 유보율은 무려 2001%(2004년 9월 말)에 달한다. 금융 부담률은 0.1%에 불과하다. 금융권에 A급 고객이 되고 있는 비결이다. 항간에서 나오는 ‘너무 보수적 경영이 아니냐’는 비판도 허 회장은 웃어 넘겼다. 


시멘트를 골간으로 한 한일시멘트는 그렇다고 한 우물만 판 기업은 아니다. 최소한 10년 앞을 본 미래 경영도 펼쳤다. 변화에 민감한 허 회장의 발 빠른 변신이 돋보인다. 허 회장은 한국 시멘트산업의 개척자로 불린다. 그러나 1970년대 국내 최초로 인도네시아에 철강회사를 설립한 국내 철강계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 후에는 산지 개발에 뛰어들어 해발 800미터가 넘는 대관령에 낙농목장을 조성, 우리 낙농업계의 산파역도 해냈다. 80년대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랜드를 건설하기도 했고, 녹십자제약을 세워 제약업계 선도 기업인이 되기도 했다. 업종은 다양했어도 경영은 내실 위주로 진행한 것은 업종을 막론하고 공통된 모습이다. 


한마디로 그는 변신의 귀재였다. 그럼에도 ‘산업보국’을 앞세운 시멘트 기본 업종을 튼튼히 하는 전략은 바뀌지 않았다. 특히 10년 앞을 내다본 경영은 본업 격인 시멘트에서 꽃을 피웠다. 91년 국내 최초로 출시한 건축 자재 ‘레미탈’의 성공이다. 


레미탈은 재래 시공 방식이 주류였던 우리 건설시장을 선진국처럼 전문적이고 기계화된 시공 방식으로 바꿔놓은 제품. 건축 현장에서 물만 섞어 공사를 할 수 있는 건축 자재다. 출시 후 10여 년간 20~30%씩 성장을 거듭한 레미탈은 2003년 발명의 날에 유수 IT기업을 제치고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을 정도가 됐다. 지난해만 해도 레미탈은 단일 아이템으로 회사에 1000억 원이 넘는 매출액을 안겨다줘 효자 역할도 톡톡히 했다. 김수강 한일시멘트 홍보팀장은 “향후 5년 내 제품 종류를 일반 건축용에서 토목 구조물의 보수 보강재와 리모델링용 등 60여 종으로 늘려 세계 경쟁력을 갖추겠다”고 비전을 밝힌다.

선친 ‘성공보다는 올바로 살라’


허 회장은 1915년 개성 인근 개풍읍에서 태어났다. 송도중학교 졸업 후인 16세 때 이미 사업가 길을 나섰다. 그는 한학자였던 부친으로부터 “사업 성공에 연연치 말라. 실패해도 괜찮으니 올바른 상술을 터득하는 데 주력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인간 존중 철학이 몸에 뱄다. 6·25 전쟁 때 홀로 월남해 부산에서 수산물 판매업으로 종자돈을 모은 그에게 전쟁은 큰 기회였다. 전쟁 후 복구사업 때 석회석 수요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1960년 상경한 그는 한국양회판매를 설립한 후 이듬해인 1961년 한일시멘트를 세웠다. 특히 그는 가족주의 경영을 펼쳤다. 한일시멘트에는 160억 원에 달하는 사내 근로복지기금이 있다. 주택 구입 시 1000만~2000만 원을 저렴하게 대출해 주고, 1인당 자녀 2명에 한해 대학교까지 학자금을 대주는 용도다. 


허 회장은 말 그대로 가족 경영을 해왔다. 장남인 정섭 씨가 한일시멘트 명예회장, 3남인 동섭 씨가 현재 한일시멘트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또 2남 영섭씨는 녹십자 회장, 4남 남섭 씨는 서울랜드 회장, 5남인 일섭 씨는 녹십자 부회장이다. 가족이 모두 계열사 경영을 해도 한일시멘트는 지급 보증이나 순환 출자가 없는 회사로 알려졌을 만큼 공사 구분이 분명하다는 평이다. 65년 노조가 세워졌지만 40년간 노동쟁의가 없다. 특히 일가족이 경영에 참여해도 노조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만큼 투명 경영이 강점이다. 


평소 허 회장은 “글 무식이 아니라 인(人) 무식을 두려워하라”는 지론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게 무너진다는 개성상인 특유의 전통을 계승한 것. 현재 선친을 이은 허동섭 한일시멘트 회장은 “우리 회사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해 왔다면 지금과 같은 내실 경영은 없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신뢰와 내실을 앞세운 인간 존중 경영이 한일시멘트를 키워낸 키워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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